1, 조도선씨의 중시조 선용신님 이하 4세의 역사 기록
조도선씨 선대 역사를 조도선씨 족보기록에 의거하여 변천사를 살펴보고, 관련 고문서를 참고하여 조도선씨들의 주장에 대한 사실여부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가. 조도선씨 을미보(1955년) 등재내용
〇 선용신 : (1세) 고려 고종조 진사 등문과 원종시 합문지후문하시랑참지정사,소탕적신임유무당 좌명공 신에 책훈되고 병부상서에 올랐다. 또 여진정벌에공을 세워 패주군(貝州君: 보성의 옛 지명)에 봉(封)하고 관(貫)을 받았다.
여사제강에 사적(事載麗史提綱)이 실려있다.
〇 선 유 : (2세) 문과 승봉랑 감찰규정 삼사좌윤 안찰사중서문하평장사
〇 선 좌 : (2세) 진사 문과 수찬
〇 선원지 : (3세) 등진사 좌우대언보승랑장우문각대제학
〇선중길 : (4세) 호용위선전관수군도만호 군감
〇 선중의 : (4세) 통정대부검교호조참의
나. 관련 고문서 열람
조도선씨 족보에 등재된 기록내용 관련된 역사적인 근거를 찾아보기 위해 고려사, 여사제강, 여사인명목록, 씨족원류,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운부군옥, 여지도서, 려조충열록, 고려명신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산양지(1741년), 신증산양지(1902년)외 여러 기록을 열람하고, 보성선씨 대종회에서 2012년 발행한 책자의 선용신, 선유, 선원지 세분의 행적내용을 살펴보았다.
2,조도선씨 시조 선용신님의 사적에 대한 기록
가. 조도선씨 시조 선용신님의 사적 변천사
○ 1757년 정축보 : 려조 성균진사 배 전씨 유이남
○ 1786년 병오보 : 려조 성균진사 배 전씨 유이자
○ 1829년 기축보 : 려조 성균진사 배 담양 전씨 유이자
○ 1864년 갑자보 : 려조 성균진사 배 담양 전씨 생이자
○ 1884년 갑신보 : 선지선본 중국인로대부선백지후 동래사적불가 공생고려
고종조 문장명세 이진사등문과사사원종관합문지후 문하시랑참지정사 소평적 신임유무당록 좌명공신
배 병부상서 우정 여진수공봉 패주군 잉 수관언사재려사제강 배위 급 묘소 실전아래
○ 1955년 을미보 : 선지선본 중국인로대부선백지후 동래사적불가 공생고려 고종조 문장명세 이진사등
문과 사사원종관합문지후 문하시랑참지정사 소평적신임유무당록 좌명공신 배 병부상서 우정 여진수공
봉 패주군 잉 수관언사 재려사제강 배위 급 묘소 실전
나. 여진정벌의 공으로 패주군에 봉하였다는 기록에 대하여...
고려가 처음으로 동북 방면의 여진을 대규모로 정벌하기 시작한 것은 문종 34년(1080)으로, 이 때 여진의 세력을 크게 꺾은 바 있다. 그러나 새로 일어난 동여진의 완옌부는 더욱 성장하여 그 세력이 두만강 부근까지 뻗어 오게 되었다. 이에 숙종은 문하시랑 평장사 임간을 보내어 막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추밀원사 윤관을 동북면 행여병마도통으로 삼아 파견하였으나 윤관 역시 패배하였다. 여진은 기병인 데 비해 고려군은 주로 보병인데다 그 조직마저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윤관은 기병인 신기군과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 그리고 도탕, 경궁, 정노, 발화 등의 특수병을 포함하는 별무반을 조직하였다. 별무반은 양반과 백정, 농민을 비롯하여 승려, 상고, 노예까지 동원된 거국적인 조직이었다. 예종 2년(1107) 12월에 윤관은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주관을 출발하여 기습 작전으로 여진족을 소탕하였다. 윤관은 점령한 지역에 옹주, 영주, 복주, 길주의 4성을 쌓고, 다음해 2월에 함주를 대도독부, 그리고 앞의 4주와 공험진을 방어주진으로 편제하였으며, 3월에는 의주와 통태진, 평융진에도 성을 쌓았다. 이것이 이른바 9성이다. 9성의 축조와 함께 남쪽 지방 주민의 사민도 실시되었다.
고려의 여진정벌은 1108년에 윤관이 여진정벌을 통해 이후 여진족이 함부로 고려를 침범하지 못했으며, 용신님이 여진정벌을 했다는 시기의 고려는 몽고의 침략과 지배를 받던 시기이다. 몽고는 1229년 징키스칸의 뒤를 이어 오고타이가 칸에 올라 요동방면의 동진국 및 금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고, 1231년 8월부터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하여 1270년 강화도에서 임유무의 매부 홍문계(홍규)와 송송례 등이 임유무를 죽임으로서 항전을 고집하던 무신정권은 완전히 종식되고 곧 출륙환도가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1270년에 다루가치가 파견되었고 몽고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삼별초가 봉기하여 강화도, 진도, 제주도로 거점을 옮기며 항전하자 몽고의 군사력에 의지하여 3년여에 걸쳐 이를 진압하였다. 이어서 려원연합군의 일본정벌이 1274년과 1279년 2차에 걸쳐서 있었으며, 2차 정벌은 태풍을 만난 뒤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퇴패했다. 이후에 고려는 원나라의 속방처럼 격하되었으며, 영토의 일부도 원나라로 빼앗겼다. 즉 고려 원종이후 충렬왕시기는 몽고의 침략과 려몽연합군의 일본정벌이 있었으며 여진정벌의 기록은 전혀 없었다.
다. 고려무신정권의 최후 임유무를 제거하였다는 기록에 대하여...
임유무(林惟茂)는 1260년 아버지 임연과 함께 집권자인 김준을 제거한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에 봉해졌다. 1270년(원종 11) 2월에 아버지 임연이 죽자, 순안후(順安侯) 종(琮)에 의해 교정별감(敎定別監)에 임명되었다. 집권한 이후 육번도방(六番都房)을 모아 자신의 집을 호위하게 하였고, 아버지 임연의 항몽정책(抗蒙政策)을 이어받아 각 도에 수로방호사(水路訪護使)와 산성별감(山城別監)을 보내어 백성들을 모아 지키게 하고, 또 장군인 김문비(金文庇)에게 야별초(夜別抄)를 거느리고 교동에 주둔하여 몽고 군대의 침입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는 장인인 사공(司空) 이응렬과 추밀원부사를 지낸 송군비(宋君斐) 등에게 물어서 정사를 결정하였다. 이에 매부(妹夫)인 어사중승(御史中丞) 홍문계(洪文系)와 직문하성(直門下省) 송송례(宋松禮)가 불만을 가지게 되자 왕은 이분성(李汾成)을 홍문계와 송송례에게 보내어 임유무를 제거하도록 하여 같은 해 5월 살해되었고, 아울러 그의 어머니 이씨와 형제들은 모두 원나라로 압송되었다. 이로써 임연 • 임유무정권은 몰락되고, 100여 년 동안에 지속되었던 무인정권(武人政權)도 붕괴되었다.
3, 조도선씨 선용신님의 자(子) 좌(佐)의 사적에 대한 기록
가. 조도선씨 선용신님의 자(子) 좌(佐)의 사적 변천사
○ 1757년 정축보 : 려조진사
○ 1786년 병오보 : 진사
○ 1829년 기축보 : 진사 배 성씨
○ 1864년 갑자보 : 진사 배 성씨
○ 1884년 갑신보 : 초휘 양좌 진사 문과 수찬 배 창녕성씨, 여 조승숙 함안인
호 덕곡 자 조종인 문과좌랑, 조종의 문현감, 자 조종예 문직제학
나. 선용신님의 자(子) 좌(佐)의 기록 관련 의문사항
1) 1786년까지 족보에 오르지 않았던 배 성씨를 1829년에 올린 근거는 무엇인가?
2) 1864년까지 없던 사위 관련 기록이 1884년에 등재된 근거는 무엇인가?
3) 조승숙선생 출생 527년후, 사후 467년에 조도계 족보에 등재된 부분을 믿을수 있을까?
4) 1대를 30년으로 추정해보면 선용신 1240년생, 선유 1270년생, 선좌 1275년생, 선좌의 여 1305년생, 남편 조승숙선생 1357년생, 52세의 연상여인과 결혼을 하였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더불어 자녀를 3명이나 낳았다면 더욱 믿을 수 있겠는가?
5) 조승숙선생 장남 조종인 1377년 丁巳生(함안조씨역사인물편 참조)이다, 아버지 20세, 어머니 72세에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6) 1836년 함안조씨 세덕편을 보면 조승숙선생 夫人 宣氏 修撰 良佐 之女 라고 나오는데 1884년 조도계의 족보 좌의 초휘로 양좌 진사 문과 수찬으로 기록이 추가되었다. 초휘를 양좌로 기록한 근거는 무엇일까? 보성이란 본관도 없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 조도선씨 가문과 덕곡 조승숙(德谷 趙承肅)선생의 관계 (별도 자료 참고)
4,산양지(山陽誌)에서 확인한 조도선씨 선대 기록
가. 산양지(山陽誌)의 기록
보성지방의 거유이며 壬辰倭亂때 義兵을 일으켰던 竹川 朴光前(1526∼1597) 선생의 손자인 朴春長(1595∼1664)선생이 저술한 보성군의 역사서인 산양지 1664년 갑진본이 간행되지 못하고 돌아가신 후에 후학들에 의해 1741년 간행되었다. 신증산양지에 나오는 선씨들은 다음과 같다.
人物/ 高麗 宣允祉. 朝鮮 宣 炯, 宣居怡, 仕宦/ 宣時中, 按廉使允祉後 司馬縣令, 宣敬眞 武 郡守, 宣世雄 時中之孫 武 僉使宣 迪 世雄之子 武 縣令, 宣重倫 武 時中之後 重試判官, 宣國衡 武 縣監 宣義問 迪之子 武 府使, 宣居怡 武 兵使 見人物, 宣重老 國衡之子 直長, 宣厚德 武 縣監, 宣光廻 武 主簿, 宣大老 主簿, 宣若海 義問之子 武 水使, 宣若采 武 宣傳官, 宣楫 若海之子 武 判官, 宣文煥 武 察訪, 宣起周 武 萬戶, 武科/ 宣世雄, 宣 迪, 宣重倫, 宣國衡, 宣餘慶, 宣應軫, 宣義問(壯元), 宣居怡, 宣光廻, 宣鳳齡, 宣義男, 宣敬眞, 宣雲望, 宣南秀, 宣德明, 宣海壽, 宣翼龍, 宣慎男, 宣達德, 宣南一, 宣弘器, 宣若海, 宣廷敏, 宣獜壽, 宣大成, 宣德隣, 宣若采, 宣 楫, 宣弘達, 宣濬哲, 宣文煥, 宣 彭, 宣起周, 宣慶龍, 宣洐斗, 宣昇祐, 宣有文, 宣再周, 宣翰斌, 宣載澄, 生員/ 宣時中 見仕宦, 宣遇贇, 宣廷達, 進士/ 宣應直, 宣仁厚, 宣羽海, 65명
나. 신증산양지의 기록에서 조도선씨 관련 의문사항
1) 山陽(보성군)의 戶口는 3,583戶, 男 7,330명, 女 7,159명, 승 214명 등 살고 있는 집의 호수, 남자, 여자 인구까지 상세하게 수록을 하였으며 조도선씨 계열의 선문환, 선여경, 선해수, 선린수, 선정민 등 일부는 수록되어 있지만, 고려진사 선용신, 선유, 선좌, 선원지, 선중의, 선중길 중에 한사람도 이름이 수록되어 있지 않았다.
2) 서기 1741년에 간행된 박춘장님의 신증산양지에 호구수, 남,여 사람수, 심지어 승려수까지 기록을 하고 있는데, 백제때 부터 살아 왔던 토성이며, 특히 고려때 패주군, 병부상서, 우문각대재학, 호조참의의 관직을 가진 인물들이라면 왜 용신님 이하 4세까지 한분도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특히 조양에서 할아버지께서 태어나고 자란 박춘장선생이 어느 마을에 누가 살고 있고 그들의 선조는 누구인지 훤히 알아보고 조사해서 산양지를 간행하였을텐데 조도선씨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3) 1902년 신증 산양지, 별유사 안규익 간행본을 살펴 보면, 보성군의 연혁, 지리, 토산품, 관원, 성씨, 풍속, 서원, 루정, 창고, 장시(시장), 역원, 봉수, 궐방(선소), 저수지, 교량, 사찰, 고적, 역대군수, 인물, 명현, 효자, 충신, 열여, 사환(벼슬하신분), 문과, 무과, 생원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모든 기록을 살펴 보아도 조도선씨 선용신님이하 4세까지는 단 한사람도 기록에 없다. 지금으로부터 110여년전 까지도 조도선씨 선대 4세까지의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 1741년 산양지와 1902년 신증산양지의 인구 및 주거현황 비교
고액(古額)= 3,583호 남자 7,330명, 여자 7,159명에서 = 이전 산양지에 등재된 인구
금액(今額)= 3,532호 남자 9,695명, 여자 7,786명 남,여합 1,7481명= 현재의 인구
초가, 12,036칸, 와가 22칸, 초와합 12,058칸, 승(僧) 5명
5,보성선씨 대종회에서 확인한 조도선씨 선대의 행적 (2012년)
조도선씨 선용신, 선유, 선원지님 3세에 대한 행적을 찾아보기 위해 고려말~이조초 시기인 서기 1235년 경부터 1400여년 경까지 참고문헌 29종 90여권을 살펴보았으나,
1世 선용신(宣用臣)님에 대한 어떠한 벼슬도 했다는 근거가 없음
⇒ 조도선씨 선용신계열의 주장은 전부 허위로 보여짐
2世 선유(宣 儒)님에 대한 어떠한 벼슬도 했다는 근거가 없음
⇒ 조도선씨 선용신계열의 주장은 전부 허위로 보여짐
3世 선원지(宣元祉)님에 대한 어떠한 벼슬도 했다는 근거가 없음
⇒ 조도선씨 선용신계열의 주장은 전부 허위로 보여짐
※ 보성군과 보성문화원 고려통일대전지등 1990년 이후 발행한 보성군지, 보성인물사등 기록에는 벼슬을 하였다는 다소 미확인된 기록은 있음
□ 결 론
하나, 성종 14년(995년), 절도사제도를 도입하면서, 보성군을 패주로 개칭하였고, 이때 별호로서 산양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종 9년(1018년)에 행정제도를 개편하면서, 보성군으로 불리우게 되었으며, 지사군으로 7개의 속현을 둔 웅군이 되었다. 임유무를 제거하였다는 1270년으로부터 252년전에 없어진 보성군의 옛 지명이 패주이다. 여진정벌은 선용신님(1240년경 출생 추정)이 태어나기 130여년 전 고려의 윤관 장군의 두 번째 여진정벌로 1107년에 완전히 끝났다. 130여년 후에 태어난 사람에게 여진정벌의 공으로 패주군에 봉하였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나, 고려무신정권의 마지막 실권자인 임유무를 제거하였다는 관련 고문서나 역사서를 아무리 찾아 봐도 선용신님의 이름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좌명공신, 병부상서라는 직위는 상당히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관직인데 증직도 아니고 행직의 경우라면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문서등에 수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나, 임유무제거 공신명단에 용신님의 이름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태어나기 130여년전 공적과 252년전 없어진 고을의 지명을 따라 좌명공신, 병부상서, 패주군에 봉하였다는 것을 사실이라고 믿을만한 역사적인 자료는 없다.
특히 여사제강에 선용신님의 사적이 실려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 여사제강을 완독해 보았지만 선용신님 관련한 내용은 단 한글자도 없었다. 보성선씨 선대 어른들께서 의조(疑祖)라고 의심할 만한 충분한 사유가 되었다고 본다.
하나, 1884년 조도계 갑신보에서부터 조도선씨 선대 인물에 대한 관직과 많은 기록들이 근거없이 추가되었다. 기록들이 추가된 이유를 발문에서 찾아 보면,
“~~이미 입수한 믿을 수 있는 행적들이 구보 발간시 탈루되었기 불가피하게 보의 내용을 보완하게 되었다... 인정으로 살펴달라. 후손 성화경식(後孫誠華敬識)”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 참고문헌
1. 본조황조인 충신목록
2. 보성선씨선세사적에 관한 역사적 고증
3. 조선반도적중국이민 역사고찰(중국인민대학 학보편집부 임견교수 논문)
4. 전라감사(전라북도)
5. 고려말 역대 전라도 관찰사(안렴사) 명록
6. 전라감사(전라일보사)
7. 전라감영지
8. 경현사(址)
9. 산양삼강록
10. 고려통일대전지(사단법인 고려역사선양회)
11. 보성군 문화유적 학술조사(전남대학교 박물관 보성군)
12. 일러두기(보성군사)
13. 국가와 민족을 빛낸 호남출신 인물(사단법인 문화보존진흥회)
14. 보성인물사(보성문화원)
15. 만성대동보(명문당)
16. 한국인의 성보(한국실록사)
17. 씨족원류(보경문화사)
18. 신증동국여지승람(명문당)
19. 전고대방(명문당)
20. 대동기문(동국전란사)
21. 한국사 대사전(교육출판공사)
22. 조선왕조실록(보성문화원, 보성군편)
23. 정충묘지(광주문화원)
24. 대동운부군옥(20권)
25. 고려사(30권, 영남대학교)
26. 고려사 절요(3권)
27. 고려 시대사(상하 3권)
28. 고려왕조실록(상하 3권)
29. 국란사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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