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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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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城宣氏가 代代로 世系를 이어 온 寶城邑 烽山里 全景>

보성선씨(寶城宣氏)가 대대로 세계(世系)를 이어 온 보성읍 봉산리(烽山里)는 주변의 나즈막한 산세에 둘린 채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봉산리(烽山里)는 총 170여 가구중 3분의 1가량이 보성선씨(寶城宣氏)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보성선씨(寶城宣氏) 가운데 특히 선전공계(宣傳公系)중심으로 이곳에 입향한 시기는 임진. 병자 (壬辰.丙子)양란 후로 추정된다고 한다. 입향조는11세손인 선이벽(宣以碧)으로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후이다. 시조 선윤지이후 보성읍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보성선씨(寶城宣氏)들은양란 이후 왜구(倭寇)들이 자주 출몰하자 이곳으로 이거해 왜구倭寇)의 만행을 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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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강매동전경>

또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강매동(江梅洞)매화정(梅花亭)마을 입향시기는 1460년대로 추정하며 입향조는 시조의 6세손인 선계철(宣季鐵)이며 유성군(楡城君,선형 炯)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당하관)로 의성현감(義城縣監:종6품수령)을 지내고 자손이 번창하여 5백년이상 선씨가문(宣氏家門)을 이어가고 있다. 마을전체 100여호 중 60여가구가 보성선씨로서 2000년도에 강릉시 대전동에 있는 오충사를 고양시 덕양구 강매동으로 이전하여 춘추로 고양유림(儒林)과 배향(配享)하고 있으며,평양공(平襄公,선형)의 사당(祠堂)을 건립하여 정월13일 배향(配享)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산으로 둘러져 있고 서쪽으로는 평야로 되어 마치 삼태기 안에 있는 형상으로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전국에서 제일 많은 가구가 집성촌(集成村)을 이루고 있으며,서울근교에서 몇 안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남아 있다. 강릉시 대전동(大田洞) 송암리마을의 보성선씨 입향시기는 시조의 11세손인 선순하(宣舜河,자는 사도 士圖)이며 아버지는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낸 선탁경(宣倬卿)이다. 그는 조봉대부(朝奉大夫)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다. 그가 강릉에 입향한때는 1650年대이며 현재는 강릉시에 70여 가구가 흩어져 살고 있으며 몇몇 후손은 강릉시 연곡면 신왕리 마암터 마을에서 농촌체험마을을 운영하고 있다.울주군 삼동면 금곡리 마을도 보성선씨 집성촌이다.

시조의 3세인 선청유(宣淸裕,순무사공)의 후손으로 시조의 9세인 선극례(宣克禮,병사공兵使公)의 손자로 선무랑(宣務郞)에 오른 선대규(宣大規)의 입향 시기는 1630년대로 추정되며 후손들이 번창하여 금곡리 마을은 15가구가 마을을 지키고 있으며 울산과 울주군에 100여 가구가 살며,일부 후손들은 김해,부산등지 에서 살고 있다. 마을에는 선명규의 공적비(功績碑)가 세워져 있으며,금곡리 마을에는 후손들이 건립한 선청유(宣淸裕).선극례(宣克禮).선대규(宣大規) 의 위패와 영정(影幀)을 모신 제실(祭室)이 있다. 후손들은 선극례(宣克禮,병사공兵使公)의 추모사업 등 많은 노력으로 울주군에 추모비(追慕碑),원모사(遠慕祠)을 건립하여 병사공(兵使公,선극례)의 위패을 모셨으며 2006년 5월10일 현판식 및 추모제를 지냈다.

충남 논산시 연무읍 마산4리 마을도 보성선씨 집성촌으로 시조의 5세인 선효양(宣孝亮)이 전북 고산(高山)으로 이거 하였으나 실전되었다고하며, 9세손인 선의춘(宣義春)이 효종때 학사(學士)로 덕산현감(德山縣監:종6품수령)을 지낼때 순후치세(淳厚治世)하여 백성들의 칭송이 대단하였다고 한다.그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와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당상관)로 이조참의(吏曹參議:정3품차관보)에 이르렀다. 이후 익산시 삼길면 서두리 원형골마을에 입향하여 이때부터 후손이 번창하였으며 서기1660년대에는 논산시 연무읍 마산리로 입향하였는데, 당시에는 60여가구가 집성촌(集成村)이었으나 현재는 20여 가구가 마을을 지키며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

보성선씨(寶城宣氏)가 대대로 세계(世系)를 이어 온 보성읍 봉산리(烽山里)는 주변의 나즈막한 산세에 둘린 채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봉산리(烽山里)는 총 170여 가구중 3분의 1가량이 보성선씨(寶城宣氏)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보성선씨(寶城宣氏) 가운데 특히 선전공계(宣傳公系)를 중심으로 이곳에 입향한 시기는 임진.병자(壬辰.丙子)양란후로 추정된다고 한다. 입향조는 11세손인 선이벽(宣以碧)으로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후이다.시조 선윤지이후 보성읍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보성선씨(寶城宣氏)들은 양란 이후 왜구(倭寇)들이 자주 출몰하자 이곳으로 이거해 왜구(倭寇)의 만행을 피했다고 한다.또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강매동(江梅洞)매화정(梅花亭)마을 입향시기는 1460년대로 추정하며 입향조는 시조의 6세손인 선계철(宣季鐵)이며 유성군(楡城君,선형 炯)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당하관)로 의성현감(義城縣監:종6품수령)을 지내고 자손이 번창하여 5백년이상 선씨가문(宣氏家門)을 이어가고 있다. 마을전체 100여호 중 60여가구가 보성선씨로서 2000년도에 강릉시 대전동에 있는 오충사를 고양시 덕양구 강매동으로 이전하여 춘추로 고양유림(유림)과 배향(배향)하고 있으며,평양공(平襄公,선형)의 사당(祠堂)을 건립하여 정월13일 배향(配享)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산으로 둘러져 있고 서쪽으로는 평야로 되어 마치 삼태기 안에 있는 형상으로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전국에서 제일 많은 가구가 집성촌(集成村)을 이루고 있으며,서울근교에서 몇 안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남아 있다.강릉시 대전동(大田洞) 송암리마을의 보성선씨 입향시기는 시조의 11세손인 선순하(宣舜河,자는 사도 士圖)이며 아버지는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낸 선탁경(宣倬卿)이다. 그는 조봉대부(朝奉大夫)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다.그가 강릉에 입향한때는 1650年대이며 현재는 강릉시에 70여 가구가 흩어져 살고 있으며 몇몇 후손은 강릉시 연곡면 신왕리 마암터 마을에서 농촌체험마을을 운영하고 있다.울주군 삼동면 금곡리 마을도 보성선씨 집성촌이다. 시조의 3세인 선청유(宣淸裕,순무사공)의 후손으로 시조의 9세인 선극례(宣克禮,병사공兵使公)의 손자로 선무랑(宣務郞)에 오른 선대규(宣大規)의 입향시기는 1630년대로 추정되며 후손들이 번창하여 금곡리 마을은 15가구가 마을을 지키고 있으며 울산과 울주군에 100여 가구가 살며,일부 후손들은 김해,부산등지 에서 살고 있다. 마을에는 선명규의 공적비(功績碑)가 세워져 있으며,금곡리 마을에는 후손들이 건립한 선청유(宣淸裕).선극례(宣克禮).선대규(宣大規) 의 위패와 영정(影幀)을 모신 제실(祭室)이 있다. 후손들은 선극례(宣克禮,병사공兵使公)의 추모사업 등 많은 노력으로 울주군에 추모비(追慕碑),원모사(遠慕祠)을 건립하여 병사공(兵使公,선극례)의 위패을 모셨으며 2006년 5월10일 현판식 및 추모제를 지냈다.충남 논산시 연무읍 마산4리 마을도 보성선씨 집성촌으로 시조의 5세인 선효양(宣孝亮)이 전북 고산(高山)으로 이거 하였으나 실전되었다고하며, 9세손인 선의춘(宣義春)이 효종때 학사(學士)로 덕산현감(德山縣監:종6품수령)을 지낼때 순후치세(淳厚治世)하여 백성들의 칭송이 대단하였다고 한다.그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와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당상관)로 이조참의(吏曹參議:정3품차관보)에 이르렀다. 이후 익산시 삼길면 서두리 원형골마을에 입향하여 이때부터 후손이 번창하였으며 서기1660년대에는 논산시 연무읍 마산리로 입향하였는데, 당시에는 60여가구가 집성촌(集成村)이었으나 현재는 20여 가구가 마을을 지키며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