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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원종1등공신

親親齊(諱 宣居怡) 친친제(휘 선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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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 全羅左兵使(행 전라좌병사)
宣武原從一等功臣
贈 資憲大夫 兵曹判書(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配 贈 貞夫人 礪山宋氏(배 증 정부인 여산송씨)

公의 諱는 居怡 이며 字는 恩愼이고 호는 親親齊라 고 한다. 始祖 退休堂先生(諱允祉)은 高麗禑王九年(西紀一三 八三年)에 湖南按廉使로서 全南海岸地方 一帶를 侵入 하며 우리나라 百姓을 괴롭히던 倭寇를 擊退시켜 道 民들을 平安하게 살도록 하시고, 極盛한 佛敎를 배척함으로서 쇠퇴한 儒敎를 復興시 켜 많은 業績을 남기신 훌륭한 政治家로서, 高麗가 滅 亡한 뒤에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시고 貞節을 굳게 지켜 官職에서 물러나셨다.

그 後 寶城郡 龍門이란 곳에 隱居하시면서 호를 退休堂이라 하고 湖南地方 一帶의 百姓들로부터 崇仰을 받으신 高麗의 忠臣이시다. 高祖父 宣和 先生은 世宗朝에 礪山府使와 龍川郡守 및 通政大夫 刑曹佐郞을 歷任하셨고, 成宗朝에 純忠補祚功臣 崇祿大夫 議政府 右贊成 兼 春秋館事로 贈職된 분이시다.

曾祖父 宣炯 先生은 世祖朝 에 黃海監司로서 李始愛 反亂을 平定하신 功으로 敵愾功臣으로 襃祿되시고, 成宗朝에 좌리공신으로 勳錄되셨으며 戶曹 刑曹 兵曹判書와 議政府 左右贊成을 역임하시고, 楡城君으로 封君되셨으며, 平襄公으로 贈職된 文武를 兼備하신 忠臣이시다.

祖父 宣 淑鐵 先生은 成宗때에 武科로 都摠府都事를 지내시고 中宗朝에 兵曹參議로 贈職되셨으며, 아버님되시는 宣祥(字雲翼)先生은 明宗때 武科에 合格하여 同知義禁府都事와 禮曹佐郞을 歷任하시고, 嘉善大夫 兵曹參議 兼 訓練院都正으로 贈職되셨다.

公은 明宗五年 庚戌(西紀一五五〇年) 八月二十日巳時에 全南 寶城郡 龍門이란 곳, 私邸에서 탄생하셨는 데, 그 날 밤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집안 뒤뜰로 뛰어들어 와서 사람들이 모두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다. 이 때 公 의 아버님 參議公이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라 필시 武略이 있어 앞으로 成人이 되면 훌륭한 사람이 되어 우리 집안의 家門을 빛나게 할 것이다』고 하시었다 한다.
公은 어려서부터 보통아이와 달라 인물이 잘생겨 剛壯하고 智略이 絶人하였으며, 어려서도 항상 洞里 아이들의 모범이 되었고 아이들과 같이 놀면서 땅위에 다 八卦를 그리고 말하기를 『이것이 諸葛亮의 八陣圖이다』라고 하시었다 한다.
이것을 본 동리 아이들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어른들도 잘모르는 「제갈량」의 팔진도를 아직 배우지도 않은 어린아이가 벌써 알고 있으니 이 아이는 자라서 국가의 훌륭한 武將이 될 것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한다. 七歲 때에 벌써 文章에 能하시어 十歲에 孝經을 通達하였으며 글쓰는 솜씨가 如流하였다 한다.
그 當時 어린 나이로 『山河는 留壯氣요 日月은 得高明이라』는 즉흥시를 作詩하시니 호은처사(湖隱處士 鄭志常이란 사람이 이 詩를 보고 칭찬하기를 『山河留壯氣란 句節에서는 그 氣節을 볼 수 있고, 日月得高明이란 句節에서는 그 心境을 엿볼 수가 있으니 이 아이는 참으로 特出한 아이다』라고 하였다. 公께서 어린 時節에 집안 살림형편이 넉넉하지 못하던 中에 마침 흉년을 당하여 生活이 困境에 처하였을 때, 공의 아버님 親舊되시는 분이 靈岩郡守가 되어 赴任하여 왔다.
公의 나이 十五歲로서 乞養文 (父母를 奉養하기 위하여 글을 써서 求乞하는 文章)을 지어 郡守에게 바치니, 郡守가 公의 孝誠이 지극함에 감동하여 상금으로 五十兩을 주었다 한다.(中間 省略) 公의 초년 시절 火賊을 물리치고 意志가 굳고 武將으로서의 소질을 겸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宣祖二 년 己巳(西紀一五六九年), 公의 나이 二十歲 때 朝廷에서는 明나라에 外來한 사람의 後孫들을 登用하고저 各道에 王命을 下達하여 報告를 받 을 때, 本郡에서는 公을 첫째로 推薦하니 公께서는 同年 三月初六日에 上京 入侍하셨다. 宣祖大王께서 公에게 下問하시기를 先祖가 누구인가를 아뢰라 하시니, 公 께서는 前兵曹判書佐理功臣 楡城君 宣炯의 曾孫이라고 아뢰였더니, 宣祖大王께서는 매우 반가와 하시며 『너의 그 장한 모습이 능히 너의 祖上의 偉業을 繼承할 수 있겠다』고 말씀하시고 宣傳官을 除授하셨다.
다음해인 宣祖三年 庚午(西紀一五七〇年) 봄에 武科에 壯元으로 合格하시고 武藝와 四書三經을 모두 通達하셨다. 이 때 公이 신은(新恩=壯元 及第한사람)으로 서애 유상공(西崖 柳相公=柳成龍)을 찾아가서 拜謁하였더니 柳相公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李舜臣을 만났고 지금 또 君을 보개 되니 마치 범장(范張=中國의 名將范巨卿과 張元伯 두 사람을 略稱한말) 이 다시 나타난 것 같다』며 하였다.
그 後 宣祖十九年 丙戌에 공이 北兵使 이일(李鎰) 휘하의 軍官으로 계청될 때에 李舜臣도 같이 李鎰 밑에서 造山堡萬戶로서 勤務하고 있었다. 公이 任地에 赴任한 後 이순신과 같이 敵을 防禦하여 여러 번 戰功을 세웠다.
同年 八 月에 호추(胡酋=오랑캐)가 대거 침입하여 公께서는 李舜臣과 같이 合心하여 오랑캐들을 모두 무찔렀던 것이다.이 戰鬪 以後 公께서는 屯田할 것과 이 地方 百姓들을 安定시키도록 하는 施策을 상주(上奏)한 바도 있다.
이로 인해 上官인 北兵使 李鎰이가 公과 李舜臣을 같이 시기하던 中 녹둔도(鹿屯島)싸움에서 李舜臣이 우리나라 軍士를 많이 희생시켰다는 理由로 트집을 잡아 李公을 모함하여 죽이 고저 營門안에서 軍法을 施行하게 되었다.
이 때 公 이 영문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동료인 李舜臣을 만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하시길『李萬戶 참으로 억울하오. 사또는 지금 추상같이 노하시어 이만호를 패군지장이라 하여 軍法施行을 한다고 하니 참으로 이렇게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소』하셨다.(이상중략)
그 後 宣祖二十一년(西紀一五八八年) 거제현령(巨濟縣令) 으로 재직중 청백(淸白)한 공으로 경상도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승진 전임 하셨다 宣祖 二十四年 全羅右水使를 歷任하시고 宣祖二十五年 임진왜란 때 동 수사로 계시다가 全羅左兵使로 歷任하셨다.
宣祖二十六年(西紀一五九三年) 부원수로 수원독성(水原禿城)에서 승리하고 二,000名의 兵力을 거느리고 幸州에 이르러 同年 二月一二日 幸州山城 싸움에서 대첩(大捷)한 날이다. 행주산성 맞은편에서 격강성원 하셨다. 동년 3월 사평일대(沙平一帶)의 적을 무찌르고 통진,김포,양주,안산,수원,남양,양성,안성,등지의 군대를 통합하여 차자화(車子火)라는 신무기를 사용하여 크게 戰勝했다.
宣祖二六年 十月에 독양(禿陽)천투에서 왜병 수천 명을 죽이고 승리하시고 그 후 진주성 싸움에서 同年 六月二六日 함락되었으며 宣祖 二八年 三月 전함 30여척을 인솔하여 녹도 싸움에서 대승했다.
宣祖二九年四月 한산도 싸움에서 水軍司令 官으로 在職시 거북선으로 왜선 10여척을 침몰시키고 승리하고 부산에서 육전으로 크 게 승리 하셨다.
宣祖三0年 四月 남해 평산포에서 왜선20여 척을 불을 질러 격침하고 상주포,곡포에서도 왜선을 격침하여 대승하여 부사 이 규문, 홍 親親齊 諱 居怡 敎旨 운용 등이 조정에 상 하려 했으나 공이 이를 말려 자기 공을 내세우지 않으셨다.
宣祖三一年(西紀1598年) 경주, 울산 싸움에 倭敵70여명을 죽이고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戰死 하셨다. 宣祖三九年四月一六日 宣祖大王께서 선무원종 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으로 훈록(勳錄)되셨고 兵曹判書로 贈職되어 옥산사(玉山祠)에 배향(配享)케 되었다.
정조(正祖)二三年 전라도 광주 송정리에 정 려(旋閭)를 세워 그 공훈을 받들게 했으며 원산사(圓山祠)를 건립하여 위령(位靈)을 받 들게 하였으며 많은 공을 세운 충신이다.
그는 자손들에게 첫째 도덕에 관한 학문을 잘 공부하고, 스스로 마음가짐을 잘 닦아서 諱 居怡 配 宋氏 敎旨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어버이를 위하여 효성을 다하여 사람 된 도리를 잘 실행하도록 힘쓸 것.

둘째 사람으로서 떳떳이 지켜야 할 도리를 잘 깨닫게 하여 장사지내는 예절 같은 것을 잘 권장하도록 힘쓸 것
이라는 가훈을 남겨 표지로 삼게 했다.
※ 宣 居怡 先生의 事績이 너무 많아 중간생략 및 중간요약함 자세한내용은 五忠祠誌 참고 바람
始祖公 敎旨

親親齊 諱 居怡 敎旨

諱 居怡 配 宋氏 敎旨

諱 居怡 配 宋氏 敎旨

諱 居怡祖 筆跡

諱 居怡祖 筆跡

선산 :  보성군 조성면 봉능리 뒷산

선산 : 보성군 조성면 봉산리 뒷산

※ 선거이부대 명명식 링크 : http//cafe.daum.net/sun.jk/YEJu/171

義齊 (諱 宣 克禮) 의제 (휘 선극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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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 慶尙水軍節度使 (행 경상수군절도사)
宣武原從一等功臣 (선무원종 1등공신)
贈 水使公 (증 수사공)

配 淑夫人 信川康氏(배 숙부인 신천강씨)

公의 휘는 克禮이요 字는 禮中이시고 貫은 寶城이며 號는 義齊 이시다.
公은 丁巳生(西紀一五五六年)이시고 大護軍 으로 壬辰倭亂에 出征하시어 慶尙左水使로 戊戌年(西紀一五九七年)에 殉節하셨다.

始祖公 諱 宣允祉 先生의 八世孫이며 太宗 朝 戶曹參判公 諱 安赫 先生의 七世孫이며, 文宗朝 巡撫使公 諱 淸裕 先生의 六世孫이며, 世祖朝 成均館 大司成을 지낸 諱 國忠 先生의 五世孫이며, 中宗朝 將任郞副校을 지낸 諱 錫 先生의 孫子이시며, 公의 아버님은 宣祖朝에 嘉善大夫 兼 訓練都正을 지낸 諱 汝沈 先生이시다.

公은 어려서부터 義勇이 간중하고 器局 홍대강인하여 孝誠과 友愛가 출전하셨다. 매사에는 大小를 不文하고 事前에 父母에 여쭌뒤에 施行하고 자만하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책들을 가까이 하며 밤낮으로 修身求道하여 經史에도 박통하고 文章에도 뛰어나셨다.

武臣인 父親의 뜻에 따라 宣祖九年(西紀一五七六年)에 丙子科 武科에 及第하시어 주역을 돌아앉아 외울 정도였으므로 試官의 물음에 막힘이 없자 試官이 感歎하여 經學이 이러한데 武臣으로 출사하기에는 아까운 人才라 하며 哀惜하게 여겨 虎榜에 首位로 拔擢 되셨다.
登科 후 武官으로 京官職인 五衛에 출사 部將 衛將등의 職을 두루 歷任하시고 마침내는 折衝將軍으로 品職되어 衛國과의 戰雲이 짙은 시기에 外冠職인 慶尙左道 水軍節度使로 被命 되시었다. 當時의 慶尙道 地域은 倭敵과의 衝突이 가장 심한곳 이어서 이 地域의 水使나 僉使에 任命되는 것은 결국 死地에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公께서는 흐트러진 軍律을 바로 잡고 많은 軍士들을 海岸 要路에 배치하여 往來剽略하여 良民들을 괴롭히고 掠奪하던 倭敵들을 掃蕩하시니 주민들이 크게 安堵함은 물론 百姓들로부터 큰 名望을 얻었다.
그 후 公께서는 遞兒職으로 계시던 宣祖二五年(西紀一五九二年) 四月에 壬辰倭亂이 誘發하여 倭敵이 벌떼처럼 몰려와 朝廷과 百姓들이 魂飛魄散하여 敵을 막을 對策에 급급하던 때에 公께서는 慶行 大護軍으로 被命되시어 다시 戰場으로 나서게 되셨다.
公은 出戰을 앞두고 어린 네 아들을 불러 앉히고는 “國難을 당하여 宗廟辭職의 安慰가 風前燈火이며 온 나라가 倭賊의 말발굽에 더럽혀지려 하는 때에 國家의 祿을 입은 자로서 지금 싸움터로 나가면 生과死를 연연하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어떠한 危急을 당하더라도 사대부의 子孫으로 당당히 對處하도록 할것이며 亂이 평정되기 전에는 절대로 나를 찾거나 소식을 전하지도 말라고 엄히 명하셨다 한다.
水使公 諱 克禮 碑閣
公께서는 多大浦 僉使 金廷瑞, 全羅 右水營 右突擊將 李彦良등과 함께 釜 山浦 戰鬪, 態川戰鬪, 馬津戰鬪, 黃石 山城, 昌原戰鬪등 수없이 많은 海戰 과 陸戰을 치루시면서 많은 戰果를 올렸다. 당시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병들의 人海戰術과 軍勢와 裝備에 있어서도 보잘것 없었던 我軍으로서는 적과 正面으로 對決한다는 것은 衆寡不敵일 수밖에 없었다.

公께서는 指揮官을 잃고 흩어졌던 軍士들과 各地에서 創意한 義兵, 民兵들로 軍隊를 再編成 周到綿密한 戰略으로 北進하는 적의 正面 또는 後面에서 攻擊해 적에게 큰 打擊을 주었으며 嶺南一帶에서 赫赫한 戰功을 세웠다.
한편 인근 주민들에게 農事를 勸獎하여 收穫을 평소처럼 올리게 하니 四方에서 굶주리고 흩어졌던 장졸들이 다투어서 雲集하여 힘을 합하자 그 名聲과 軍勢가 날로 더욱 떨쳤다. 宣祖三十年(西紀一五九七年) 丁酉再亂때 公께서는 明軍과 합동으로 蔚山戰鬪에 參戰 戰鬪 첫날(十二月二十二日) 진양에서 蔚山城으로 支援차 出動하는 倭將 전야장경의 군사들을 통쾌히 擊滅하고 敵將은 간신히 逃走하였다. 이 날 저녁으로 公께서는 軍士들을 은밀히 移動시켜 다음날 午前에 蔚山邑城을 攻擊하고 敵將 三名을 죽인 다음 적의 假營을 불태우니 적도 매우 당황해서 城門을 닫고 급회 西生浦의 가등청정에게 救援을 要請하였다.
十二月二四日에는 끊임없이 砲를 쏘고 火殺을 쏘아 적수六〇〇여급을 베고 敵物을노획하였다 또한 慶北 永川의 戰鬪에서는 적을 火攻으로 攻擊 불에 타는 적 死體의 악취가 수십리까지 퍼졌다.
公께서는 亂이 끝날 무렵인 宣祖三十一年(西紀一五九八年) 新靈面 戰鬪에서 退陣하던 적군 殘滅을 陳頭에서 독전하시다 아깝게 殉節하시니 이 때의 公의 나이 四十二歲였다.
水使公 諱 克禮 墓所
宣祖三十八年(西紀一六〇五年) 임금 으로부터 그 忠節을 높이기려 宣武原 從 一等功臣으로 償勳錄卷하고 玉盃 를 恩賜 水使公으로 拜受받으셨다.

당시 公과 함께 戰鬪에 參戰하셨던 功臣들의 功績을 기리고자 慶南 蔚山 廣域市 蔚州郡 三南面 校洞里 酌川亭 바위에 宣武原從 功臣 10位의 職位, 尊啣, 本貫 등이 새겨져 있고 地域 儒林에서도 追慕式 을 가져온 바 그 紀錄을 根據로 하여 10個 의 門中 後孫들이 뜻을 같이하여 西紀 一九八四年에 發議하여 西紀一九八六年 酌川亭에 宣武原從 功臣 追慕碑를 세워 每年 陰曆 四月 十三日 各 門中과 地域人士들이 모여 地域 儒林行事로 追慕式을 參拜하고 있으며 西紀一九九五年 三月에 蔚山郡守로부터 豫算支援을 받아 碑閣을 建立하여 現存하다.
* 巡撫使公 系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