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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충신

退休堂(諱 宣允祉) 퇴휴당(휘 선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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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職 明國 文淵閣學士(행직 문연각학사)
高麗 全羅安廉使(전라안렴사)
贈職 資憲大夫吏曹判書(증직 자헌대부이조판서)
配 贈貞夫人 延安李氏(배 증정부인 연안이씨)

선생(先生)의 성(姓)은 선(宣)이고 이름은 윤지(允祉)요 자(字)는 무엇인지 전하지 않으며 관(貫)은 보성(寶城)이며 호는 용암(龍庵) 또는 퇴휴당(退休堂)이라 한다.

선생께서 보성선씨(寶城宣氏)의 시조(始祖)가 되시며, 중국으로부 터 우리 나라로 들어오시기까지의 그 선적은 춘추전(春秋傳)에 대 략(大略) 기재(記載)되어 있는 바, 그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2,800년전 중국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인 노(魯)나라 때에 이름은 시평(始平)이며 자(字)는 징음(徵音)이라고 하는 분이 대부선백(大夫宣佰)이란 벼슬을 지내 셨는 바 그 시(諡 : 시호) 『宣』자로서 성(姓)을 삼으셨으니 이분이 선씨의 원조(元祖)가 되시는 분이며 후에 진(晋)나라에 초빙(招聘)되어 한기(韓起)라는 곳에서 거처하시면서 통역상(通易象)이라는 책 2편을 저술(著述)하여 그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분이시다.(魯나라는 孔子께서 출생한 나라임)

그후 後孫되시는 선양(宣襄) 선생은 주(周)나라 말기에 대상(大常)이 되셨으나 벼슬을 버리시고 사집(師縶), 사양(師襄)이란 사람과 같이 해서(海西)라는 곳에서 은거(隱居)하셨었으며, 한(漢)나라 말기에 이르러 대홍로(大鴻로) 선여학(宣汝學) 선생의 아들인 선병(宣秉)(字 巨松) 선생도 운양(雲陽)이란 곳에 거주하시면서 전원(田園)을 조용히 산책하시며 자연과 독서(讀書)를 벗삼고 어지러운 세상에는 나가지 아니하셨다.

그뒤 왕망(王莽)이 스스로 태부(太傅)가 되어 안한공(安漢公)이라고 칭하면서 집권(執權)할 때, 선생에게 여러 번 관직(官職)에 나올 것을 권하여도 불의(不義)한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다고 하시며 이에 응하지 않았던 바, 그 후 유수(劉秀)가 왕망의 軍士를 곤양(昆陽)에서 격파(擊破)하여 왕망을 죽이고, 한실(漢室)을 복흥(福興)시켜 후산(後漢)을 세워(서기 24년) 광무황제(光武皇帝)가 되고 낙양(洛陽)에 수도를 정하여 즉위(卽位)한 뒤 선생의 명성(名聲)과 절개(節介)가 있음을 듣고 현훈안거(玄纁安車)로써 영접(迎接)하여 어사(御史)에 임명하였다가, 사율상서(司律尙書)로 전임(傳任)케 하니 당시에 경사(京師=서울)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선생을 우러러 삼독좌(三讀座)라고 불렀다 한다.
그후 동한말기(東漢末期)부터는 문헌(文獻) 상으로 전하여 오는 것이 없다가, 송(宋)나라 흠종(欽宗) 때(高麗 仁宗4년 병오(丙午)(1126년)에 선찬(宣贊) 先生이 청소사(請昭使)가 되시어 황제의 특사(特使)로서 고려에 들어오신 일이 있었고, 그뒤 1213년후 원(元)나라 말기인 순제(順帝) 17년 원지정([元至正]9년 기축(己丑) 고려 충정왕(忠定王 1년 1349년] 윤(閏) 6월에 선사당(宣使黨) 선생께서 중서(中書)로 고려에 들어오신 일이 있었다.(이해 10월에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이 王이 되기 전 강릉대군(江陵大君) 때 원나라서 위왕(衛王)의 딸 노국공주(魯國公主)와 결혼함)
같은 순제24년(고려 공민왕5년 1356년) 2월에는 선천계(宣天桂) 선생이 원(元)나라 황제의 명(命)을 받고 판도총랑(版圖摠郞)으로서 고려 공민왕에게 의복(衣服)과 술을 바치고 돌아간 일이 있다. 그로부터 12년후인 명나라 초기에 (고려 공민왕 17년 무신(戊申) 1368년) 선천계(宣天桂) 선생이 명(明)나라 태조(太祖)에 먕(命)을 받고 또다시 고려에 왔다가 그대로 송경(松京)(지금의 開城)에 머물러 살게 되셨다. 그러나 선생의 유적(遺蹟)이 고려사에 전하지 않으니 섭섭한 일이다.
이상이 보성선씨(寶城宣氏)의 시조(始祖)이상의 대략(大略)이며, 시조되시는 선윤지(宣允지) 선생은 운양(雲陽)의 정절(貞節)을 계승(繼承)하고 장강(長江)의 숙기(淑氣)를 이어 받어서, 20세 약관(弱冠)으로 대명전시책(大明殿試策)(지금의 高等考試와 같음)에 장원(壯元)으로 합격하시니, 명(明)나라 황제가 불러 보시고 그 인품(人品)됨이 신인(神人)의 풍채(風采) 같다고 극구 칭찬하며 서대(犀帶=의관에 두르는 띠)와 인검(印鈐)을 하사(下賜)하시는 동시 문역각 문연각학사(文淵閣學士)에 임명(任命)하였다.
선생은 성격(性格)이 총명하고 영리하여 13세 때에 벌써 문장(文章)으로서 이름이 났고, 15세 때에 공자(孔子)의 『대학지도(大學之道)』에 통달(通達)하셨는데 대학지도에 가르치는 정심(正心), 수신(修身),으로부터 격물(格物), 치지(致知)에 이르렀으며, 항상(恒常) 말씀하시기를 『선비된 자가 처세(處世)하는 데에는 충효(忠孝)를 첫째로 하고 무예(武藝)를 둘째로 하여야 하며, 항상 효경(孝經)과 곡례(曲禮)와 내칙(內則) 등(等) 편(篇)을 외우라』 강조하셨다.
또한 활쏘기는 육예(六藝)중의 하나라고 하시며, 향례(鄕禮)에 있어서 불가불(不可不) 알아야 한다고 강조(强調)하셨다. 당대(當代)에 이름난 선비들과 같이 확상(矍相)이란 곳에서 회유(會遊)하시며 하루종일 과녁에 맞힌 화살을 세어 보니 하나도 빗나간 것이 없었다고 한다. 관중(觀衆)이 다들 말하기를 선생의 덕을 보려고 하면 이런 기회가 다시 없다고까지 찬사(讚辭)를 아끼지 않았다고 하니 이것이 공자(孔子)가 말씀하신 소위 불실정곡(不失正鵠)이라는 것이다.
명(明)나라 태조(太祖)3년(고려 공민왕 19년 1370년)에 고려의 사신(使臣) 배여도(裵如度)가 명나라에 갔을 때, 명나라 황제가 고려의 국내사정을 일일이 하문(下問)하는 자리에서 배여도(裵如度)는 왜구(倭寇=일본의 도적떼)들이 호남지방에 마구 쳐들어와 민생이 도탄에 빠졌고, 특히 조양(兆陽), 복홀(伏忽) 두 현(縣)은 피해가 막심하여 폐현(廢縣)이 되다시피 되었습니다 하고 실정(實情)을 아뢰니 황제가 이는 고려국에 왜구를 무찌를 만한 인재(人材)가 없는 까닭이라고 말하며, 특명(特命)으로 당시에 문연각학사(文淵閣學士)로 계시던 선선생(宣先生)과 첨의정(僉議政) 양기(楊起)선생에게 고려로 같이 가서 왜구의 난입(亂入)을 평정(平定)하라고 하였다.
두분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고려에 오게 됨에 고려우왕(高麗禑王)이 마중 나와 영접(迎接)하여 양선생(楊先生)은 평장사(平章事=관명)에 임명(任命)하여 조정(朝庭)에 머물러 내정(內政)을 돕게 하고 선선생(宣先生)은 호남안렴사(湖南按廉使)로 임명하니 이 때가 고려우왕8년[明 홍무(洪武)15년 임술(壬戌) 1382년]이었다.
선생께서 병권(兵權)을 인수(引受)하시고 수천명의 군사(軍士)를 영솔(領率)하여 호남지방으로 안절남정(按節南征)하시여, 우왕9년(서기 1383년)에 용전분투(勇戰奮鬪)하시어 왜구(倭寇)의 소굴(巢窟)을 소탕하고 나서 관음포(觀音浦) 일대(一帶)에서 잔적(殘敵)을 격멸(擊滅)하여 승리를 거둔 후 피해(被害)된 강토(疆土)를 회복(回復)하셨다.
이 소식이 조정(朝廷)에 알려지자 우왕(禑王)은 조양(兆陽), 복혹(伏忽) 두 현(縣)을 함하여 일군(一郡)으로 하고 선생으로 하여금 이 지방 일대를 다스리게 하니 이곳이 지금의 보성군(寶城郡)이다. 선생께서는 어질고 깨끗한 정치(政治)를 베풀어 백성들의 부역(賦役)을 없애고 누에치고 농사짓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게 하니 2년 이내에 백성들의 생활은 부강(富强)하여져 스스로 선생을 신뢰(信賴)하고 따르게 되었다.
그 당시 즉 고려말엽(高麗末葉)에 우리나라는 불교(佛敎)가 극성(極盛)하여 그 폐단(弊端)이 전국에 적지 않었으니, 특히 호남지방이 심하여 명산승지(名山勝地)는 모두 불상(佛像)을 모신 절터로 변하고, 대가명사(大家名士)는 불문(佛門)에 들어가 천한 일로 날을 보내니 유학(儒學)은 쇠퇴하고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선생께서는 이 곳에 부임하시면서부터 불상(佛像)을 철폐(撤廢)하고 사찰(寺刹)을 정비(整備)하여 불교를 배척(排斥)하시며 어리석은 백성들을 깨우쳐 불교를 기르는데 성의(誠意)를 다하시니, 호남지방에 사문(斯文=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이 다시 부흥(復興)하게 되었다.
또한 선생께서는 당시에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예(禮로)서 부모의 3년상을 마친 사람이 있으면 군관(軍官)을 파견(派遣)하여 제물(祭物)을 전하여 위문(慰問)하고, 열심히 공부하며 수양(修養)을 쌓는 사람이 있으면 관리(官吏)를 보내어 위로(慰勞)하시니 선니(宣尼=孔子를 가리키는 존칭)의 학문(學問)이 부흥(復興)하였다고까지 백성들의 칭송이 대단하였었다.
선생께서 성관(姓貫)을 보성(寶城)으로 정하신 것은 왜구(倭寇)를 쳐부수고 이 곳에 머무르시게 된 까닭이다. 그후 선생께서 돌아가신 뒤에 도민(道民)들이 선생의 공덕을 사모(思慕)하여 보성군(寶城郡) 한식동(寒食洞)에 사당(祠堂)을 건립(建立)하여 진영(眞影)을 모시고 봄 가을로 성대한 제사를 지냈다.
선생께서는 평상시에 고려의 명신인 야은 길재(冶隱 吉再), 장령 서견(掌令 徐甄)과 농암 김주(籠岩 金澍)와의 지조(志操)와 절개(節介)를 서로 사랑하시고 교의(交義)가 두터우셨다. 이 분들은 고려가 멸망(滅亡)하고 조선(朝鮮)이 건국(建國)됨에 두 임금을 섬기는 것은 선비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여 벼슬을 내놓고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니 이 세 분들이 모두 고려말기에 충신들이었다. 특히 길재 선생은 호를 야은(冶隱)이라고 하시며, 저 유명한 고려3은(高麗三隱)(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중의 한 분으로서 유명한 성리학자이고, 우왕말년에는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가 되어 태학(太學)의 유생(儒生)들을 교도하였으며 고려가 멸망한 뒤에는 고향인 경북 선산에 내려가서 학생(學生)을 모아 교육사업(敎育史業)에 헌신한 분이다.
길재 선생이 고려가 멸망한 뒤 섬기던 옛 임금을 생각하며 개성을 다시 찾아가 폐도(廢道)가 된 송악일경(松嶽一境)의 산천(山川)을 바라보며 슬픈 심회(心懷)를 읊은『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라는 유명한 시조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선생께서는 관직(官職)을 물러나시기 전에 보성군(寶城郡)의 용문(龍門)이란 곳에서 사셨던 까닭에 호(號)를 용암(龍庵)이라고 지으셨다가, 고려가 멸망(공양왕3년 서기 1392년)함에 벼슬을 내놓고 정계에서 은퇴(隱退)하시어 호(號)를 퇴휴당(退休堂이)라고 고치시고 고려의 유신(遺臣)들과 같이 절개(節介)를 굳게 지키셨다. 조정에서는 여러 번 선생께서 벼슬길에 나오실 것을 권하였으나 이에 응하시지 아니하시고 산수를 벗삼으며 여생(餘生)을 보내셨다.
선생의 유적(遺蹟)은 산양지 여조인물편(山陽誌 麗朝人物篇)에 대략 기록되어 있으나 진영(眞影) 및 사당(祠堂)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소멸(消滅)되고 말았다. 그 후에 영조15년(서기 1739년)에 성균관(成均館) 및 호남지방 유생(湖南地方 儒生)들이 발의통장(發議通章)하여 다시 先生의 사당(祠堂)을 보성군(寶城郡) 옥산동(玉山洞)에 세우고, 후손(後孫) 유성군 휘 형(楡城君, 諱 炯), 병사공 휘 거이 (兵使公,諱 居怡), 수사공 휘 약해(水使公, 諱 若海), 영장공 휘 세강 (營將公, 諱 世綱) 4위를 같이 배향(配享)하여 옥산사(玉山寺)라고 칭하였다. 이 사당이 오충사의 전신인 것이다.(五忠祠誌에서)
始祖公 敎旨

始祖公 敎旨

始祖公 配 李氏 敎旨

平襄公(諱 宣 炯) 평양공 (휘 선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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兼 判義禁府事(유성군 선 형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贈 大匡輔國崇祿大夫(대광보국숭록대부)
右議政 兼 領經筵事(우의정 겸 영경연사)
諡 忠愍公 平襄公(시 충민공 평양공)
配 永川君夫人(영천군부인)
贈 貞敬夫人(증 정경부인) 延安李氏(연안이씨)

公의 諱는 炯이며 字는 明汝(또는 正剛이라고도 함) 이다. 始祖 退休堂先生(諱允祉)은 高麗禑王九年(西紀一 三八三年)에 湖南按廉使로서 全南海岸地方 一帶를 侵入하며 우리나라 百姓을 괴롭히던 倭寇를 擊退시켜 道 民들을 平安하게 살도록 하시고, 極盛한 佛敎를 배척함으 로서 쇠퇴한 儒敎를 復興시켜 많은 業績을 남기신 훌륭한 政治家로서, 高麗가 滅亡한 뒤에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시고 貞節을 굳게 지켜 官職에서 물러나셨다. 그 後 寶城郡 龍門이란 곳에 隱居하시면서 호를 退休堂이라 하고 湖南地方 一帶의 百姓들로부터 崇仰을 받으신 高麗의 忠臣이시다.

公의 아버님 되시는 宣和 先生은 世宗朝에 礪山府使와 龍川郡守 및 通政大夫 刑曹佐郞을 歷任하셨고, 成宗朝에 純忠補祚功臣 崇祿大夫 議政府 右贊成 兼 春秋館事로 贈職되셨으며, 祖父 宣光裕 先生은 安岳郡守를 지내시고 工曹叅議와 戶曹參判으로 贈職되신 분이며, 曾祖父 宣安赫 先生은 文科에 合格하여 戶曹參判을 지내시고 戶曹判書에 贈職되셨다.

公은 世宗十六年 甲寅(西紀一四三四年) 八月十五日午時에 贊成公의 둘째 아드님으로 탄생하셨는데 아버님 되시는 贊成公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가 장래 낭묘기(廊廟器=朝廷에 登用되여 큰 人材가 된다는 뜻)가 될 것이라 하셨고 贊成公의 친구 되시는 韓確이라는 사람은 公을 한번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는 君家의 名馬로서 하루에 千里를 달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比喩하여 칭찬하였다 한다.

公은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어 일찍이 제사지내는 절차를 배웠고 詩를 잘지으시어 주위 사람들의 칭찬이 대단했고, 겸하여 武藝에 能하셨으며, 사람된 度量이 컸고, 체격 역시 壯大하여 눈이 별같이 휘황하게 빛났으며 풍체가 뛰어나게 잘 생기셨다.
公의 나이 十七歲때인 文宗一年 辛未(西紀一四五一年)에 武科에 合格되어 처음으로 官職에 登用되신 바, 公이 武科를 택하신 것은 늘 말씀하시기를 『文과 武가 成功하는 첫길이요, 忠과 孝가 몸을 바로 가지며 處世하는 데 똑같이 지켜야 할 일이니라』고 하셨던 까닭이다.
十七歲의 若冠인 公을 引見하신 文宗大王께서 그 괴걸(魁傑)함을 보시고 先祖가 누군인가를 물으시니, 옆에 있던 承旨가『湖南按廉使 宣允祉의 後裔요 補助功臣 宣和의 아들입니다』하고 아뢰인 즉 文宗大王께서『네가 忠烈의 子孫으로 그 위대함이 이와 같으니 社稷을 지키는 人材가 될 것이라. 너는 더욱 공부에 힘을 써라』 그 後 外職인 鏡城府使로 나가셨다가 承旨가 되시어 內職으로 들어오셨고 여러 가지 벼슬을 歷任하셔도 世上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아니 하였다.
世祖十三年 丁亥(西紀一四六七年) 五月에 公이 黃海監司로서 吉州의 反賊 李施愛의 反亂을 討伐하실 때 軍士를 거느리지 않고 단신으로 敵陣 속으로 말을 달려들어 가시며 크게 외치기를 『너희들도 같은 임금의 臣下로서 潢池를 盜弄함은 마치 가마솥 속에서 노는 물고기와 같은 妄擧이라.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내가 너희들을 殲滅하고 말 것이다』하시고 御賜劍을 뽑아들고 『一夫로서 萬軍을 當 하려 함은 오직 忠義가 있을 뿐이라.
너희들이 진정으로 賊心이 있으면 빨리 나와 대항하자』하고 호령하시니 敵陣 中에서 한 사람이 奮然히 나와 싸우려고 함에 李施愛가 이를 中止시키면서 『저들은 곧은 官軍이고 우리는 反亂軍으로서 굽은 行動이니 대항하지 말라』하고 만류하였다 한다.
公은 陣으로 돌아와 軍士를 督勵하여 용감하게 싸워서 한 달 동안에 賊 兵을 完全히 무찌르고 승리를 거두어 九月달에 반사(班師=回軍)하니 世祖 大王께서는 크게 반기시고 정출출기 (精忠出氣) 포의적개(布義敵愾) 功臣 으로 포록(襃祿)하시며 兪城君으로 封君하시고 正憲大夫 兵曹判書를 授하셨다.
그 後 成宗二年 辛卯(西紀一四七一年)四月에 忠淸監司로 外職에 나가셨다가 재차 순성명량(純誠明亮) 경제홍화(經濟弘化) 좌리공신(佐理功臣)에 參榜되셨고, 그 功勞로 刑曹判書를 除授받으시어 다시 內職으로 들어오셨다.
그 後 戶曹判書에 轉任되셨고 벼슬이 올라 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左贊成을 지내셨다가 成宗十年(西紀一四七九年) 一月十三日에 享年四十五歲로서 永眠하시니 成宗大王께서 平襄公을 贈諡하시고, 同年 三月二十二日에 禮曹葬(政府에서 지내 주는 葬禮)으로 京畿道 始興郡 東面 塔立洞 유좌(酉坐)에 安葬되셨다.(現, 서울시 冠岳區 奉天洞이며 公의 後孫인 寶城宣氏 梅花亭 門中에서 享祀 및 墓所 等 모든 管理을 하고 있다)
公의 一生은 한마디로 말하여 忠孝 두 글자뿐이었다.창졸 위급한 때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시며, 춥고 더운 것을 가리지 않고, 나라를 爲하여는 한 발자욱도 뒤로 물러서지 아니하시니 참으로 吉甫의 문무요 葬公의 雅量이로다.
이와 같이 고아대독(高牙大纛=軍隊의 總指 揮官인 大將의 旗幟)도 公의 榮 貴가 될 수 없 고 黃金이나 白璧도 公의 富貴가 될 수 없다. 公의 功勳은 마땅히 金石에 기록하고 이정(彝 鼎)에 그 이름을 새겨 後世에 길이 傳하는 것 이 公의 英靈도 당연한 바로 아실 것이요,
公을 爲하는 것이다. 壬戌에 大匡輔國崇祿大 夫議政府右議政 兼 領經筵事監春秋舘事에 贈職 되셨다. 公에게 아드님 三兄弟가 계시니 첫째 분(諱 晩鐵)은 通德郞을 지내셨고, 둘째분(諱 淑鐵)은 成宗때에 武科로 都摠府都事를 지내시 고 中宗朝에 兵曹參議로 贈職되셨으며, 셋째분 (諱 季鐵)은 通訓大夫 義城縣監을 역임하셨고 承政院左承旨에 贈職되셨다.(五忠祠誌에서)
始祖公 敎旨

楡城君 諱 炯 敎旨

楡城君 諱 炯 配 李氏 敎旨

楡城君 諱 炯 配 李氏 敎旨

平襄公 諱 炯의 墓所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平襄公 諱 炯의 墓所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平襄公墓碑

平襄公墓碑

親親齊(諱 宣居怡) 친친제(휘 선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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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 全羅左兵使(행 전라좌병사)
宣武原從一等功臣
贈 資憲大夫 兵曹判書(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配 贈 貞夫人 礪山宋氏(배 증 정부인 여산송씨)

公의 諱는 居怡 이며 字는 恩愼이고 호는 親親齊라 고 한다. 始祖 退休堂先生(諱允祉)은 高麗禑王九年(西紀一三 八三年)에 湖南按廉使로서 全南海岸地方 一帶를 侵入 하며 우리나라 百姓을 괴롭히던 倭寇를 擊退시켜 道 民들을 平安하게 살도록 하시고, 極盛한 佛敎를 배척함으로서 쇠퇴한 儒敎를 復興시 켜 많은 業績을 남기신 훌륭한 政治家로서, 高麗가 滅 亡한 뒤에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시고 貞節을 굳게 지켜 官職에서 물러나셨다.

그 後 寶城郡 龍門이란 곳에 隱居하시면서 호를 退休堂이라 하고 湖南地方 一帶의 百姓들로부터 崇仰을 받으신 高麗의 忠臣이시다. 高祖父 宣和 先生은 世宗朝에 礪山府使와 龍川郡守 및 通政大夫 刑曹佐郞을 歷任하셨고, 成宗朝에 純忠補祚功臣 崇祿大夫 議政府 右贊成 兼 春秋館事로 贈職된 분이시다.

曾祖父 宣炯 先生은 世祖朝 에 黃海監司로서 李始愛 反亂을 平定하신 功으로 敵愾功臣으로 襃祿되시고, 成宗朝에 좌리공신으로 勳錄되셨으며 戶曹 刑曹 兵曹判書와 議政府 左右贊成을 역임하시고, 楡城君으로 封君되셨으며, 平襄公으로 贈職된 文武를 兼備하신 忠臣이시다.

祖父 宣 淑鐵 先生은 成宗때에 武科로 都摠府都事를 지내시고 中宗朝에 兵曹參議로 贈職되셨으며, 아버님되시는 宣祥(字雲翼)先生은 明宗때 武科에 合格하여 同知義禁府都事와 禮曹佐郞을 歷任하시고, 嘉善大夫 兵曹參議 兼 訓練院都正으로 贈職되셨다.

公은 明宗五年 庚戌(西紀一五五〇年) 八月二十日巳時에 全南 寶城郡 龍門이란 곳, 私邸에서 탄생하셨는 데, 그 날 밤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집안 뒤뜰로 뛰어들어 와서 사람들이 모두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다. 이 때 公 의 아버님 參議公이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라 필시 武略이 있어 앞으로 成人이 되면 훌륭한 사람이 되어 우리 집안의 家門을 빛나게 할 것이다』고 하시었다 한다.
公은 어려서부터 보통아이와 달라 인물이 잘생겨 剛壯하고 智略이 絶人하였으며, 어려서도 항상 洞里 아이들의 모범이 되었고 아이들과 같이 놀면서 땅위에 다 八卦를 그리고 말하기를 『이것이 諸葛亮의 八陣圖이다』라고 하시었다 한다.
이것을 본 동리 아이들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어른들도 잘모르는 「제갈량」의 팔진도를 아직 배우지도 않은 어린아이가 벌써 알고 있으니 이 아이는 자라서 국가의 훌륭한 武將이 될 것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한다. 七歲 때에 벌써 文章에 能하시어 十歲에 孝經을 通達하였으며 글쓰는 솜씨가 如流하였다 한다.
그 當時 어린 나이로 『山河는 留壯氣요 日月은 得高明이라』는 즉흥시를 作詩하시니 호은처사(湖隱處士 鄭志常이란 사람이 이 詩를 보고 칭찬하기를 『山河留壯氣란 句節에서는 그 氣節을 볼 수 있고, 日月得高明이란 句節에서는 그 心境을 엿볼 수가 있으니 이 아이는 참으로 特出한 아이다』라고 하였다. 公께서 어린 時節에 집안 살림형편이 넉넉하지 못하던 中에 마침 흉년을 당하여 生活이 困境에 처하였을 때, 공의 아버님 親舊되시는 분이 靈岩郡守가 되어 赴任하여 왔다.
公의 나이 十五歲로서 乞養文 (父母를 奉養하기 위하여 글을 써서 求乞하는 文章)을 지어 郡守에게 바치니, 郡守가 公의 孝誠이 지극함에 감동하여 상금으로 五十兩을 주었다 한다.(中間 省略) 公의 초년 시절 火賊을 물리치고 意志가 굳고 武將으로서의 소질을 겸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宣祖二 년 己巳(西紀一五六九年), 公의 나이 二十歲 때 朝廷에서는 明나라에 外來한 사람의 後孫들을 登用하고저 各道에 王命을 下達하여 報告를 받 을 때, 本郡에서는 公을 첫째로 推薦하니 公께서는 同年 三月初六日에 上京 入侍하셨다. 宣祖大王께서 公에게 下問하시기를 先祖가 누구인가를 아뢰라 하시니, 公 께서는 前兵曹判書佐理功臣 楡城君 宣炯의 曾孫이라고 아뢰였더니, 宣祖大王께서는 매우 반가와 하시며 『너의 그 장한 모습이 능히 너의 祖上의 偉業을 繼承할 수 있겠다』고 말씀하시고 宣傳官을 除授하셨다.
다음해인 宣祖三年 庚午(西紀一五七〇年) 봄에 武科에 壯元으로 合格하시고 武藝와 四書三經을 모두 通達하셨다. 이 때 公이 신은(新恩=壯元 及第한사람)으로 서애 유상공(西崖 柳相公=柳成龍)을 찾아가서 拜謁하였더니 柳相公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李舜臣을 만났고 지금 또 君을 보개 되니 마치 범장(范張=中國의 名將范巨卿과 張元伯 두 사람을 略稱한말) 이 다시 나타난 것 같다』며 하였다.
그 後 宣祖十九年 丙戌에 공이 北兵使 이일(李鎰) 휘하의 軍官으로 계청될 때에 李舜臣도 같이 李鎰 밑에서 造山堡萬戶로서 勤務하고 있었다. 公이 任地에 赴任한 後 이순신과 같이 敵을 防禦하여 여러 번 戰功을 세웠다.
同年 八 月에 호추(胡酋=오랑캐)가 대거 침입하여 公께서는 李舜臣과 같이 合心하여 오랑캐들을 모두 무찔렀던 것이다.이 戰鬪 以後 公께서는 屯田할 것과 이 地方 百姓들을 安定시키도록 하는 施策을 상주(上奏)한 바도 있다.
이로 인해 上官인 北兵使 李鎰이가 公과 李舜臣을 같이 시기하던 中 녹둔도(鹿屯島)싸움에서 李舜臣이 우리나라 軍士를 많이 희생시켰다는 理由로 트집을 잡아 李公을 모함하여 죽이 고저 營門안에서 軍法을 施行하게 되었다.
이 때 公 이 영문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동료인 李舜臣을 만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하시길『李萬戶 참으로 억울하오. 사또는 지금 추상같이 노하시어 이만호를 패군지장이라 하여 軍法施行을 한다고 하니 참으로 이렇게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소』하셨다.(이상중략)
그 後 宣祖二十一년(西紀一五八八年) 거제현령(巨濟縣令) 으로 재직중 청백(淸白)한 공으로 경상도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승진 전임 하셨다 宣祖 二十四年 全羅右水使를 歷任하시고 宣祖二十五年 임진왜란 때 동 수사로 계시다가 全羅左兵使로 歷任하셨다.
宣祖二十六年(西紀一五九三年) 부원수로 수원독성(水原禿城)에서 승리하고 二,000名의 兵力을 거느리고 幸州에 이르러 同年 二月一二日 幸州山城 싸움에서 대첩(大捷)한 날이다. 행주산성 맞은편에서 격강성원 하셨다. 동년 3월 사평일대(沙平一帶)의 적을 무찌르고 통진,김포,양주,안산,수원,남양,양성,안성,등지의 군대를 통합하여 차자화(車子火)라는 신무기를 사용하여 크게 戰勝했다.
宣祖二六年 十月에 독양(禿陽)천투에서 왜병 수천 명을 죽이고 승리하시고 그 후 진주성 싸움에서 同年 六月二六日 함락되었으며 宣祖 二八年 三月 전함 30여척을 인솔하여 녹도 싸움에서 대승했다.
宣祖二九年四月 한산도 싸움에서 水軍司令 官으로 在職시 거북선으로 왜선 10여척을 침몰시키고 승리하고 부산에서 육전으로 크 게 승리 하셨다.
宣祖三0年 四月 남해 평산포에서 왜선20여 척을 불을 질러 격침하고 상주포,곡포에서도 왜선을 격침하여 대승하여 부사 이 규문, 홍 親親齊 諱 居怡 敎旨 운용 등이 조정에 상 하려 했으나 공이 이를 말려 자기 공을 내세우지 않으셨다.
宣祖三一年(西紀1598年) 경주, 울산 싸움에 倭敵70여명을 죽이고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戰死 하셨다. 宣祖三九年四月一六日 宣祖大王께서 선무원종 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으로 훈록(勳錄)되셨고 兵曹判書로 贈職되어 옥산사(玉山祠)에 배향(配享)케 되었다.
정조(正祖)二三年 전라도 광주 송정리에 정 려(旋閭)를 세워 그 공훈을 받들게 했으며 원산사(圓山祠)를 건립하여 위령(位靈)을 받 들게 하였으며 많은 공을 세운 충신이다.
그는 자손들에게 첫째 도덕에 관한 학문을 잘 공부하고, 스스로 마음가짐을 잘 닦아서 諱 居怡 配 宋氏 敎旨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어버이를 위하여 효성을 다하여 사람 된 도리를 잘 실행하도록 힘쓸 것.

둘째 사람으로서 떳떳이 지켜야 할 도리를 잘 깨닫게 하여 장사지내는 예절 같은 것을 잘 권장하도록 힘쓸 것
이라는 가훈을 남겨 표지로 삼게 했다.
※ 宣 居怡 先生의 事績이 너무 많아 중간생략 및 중간요약함 자세한내용은 五忠祠誌 참고 바람
始祖公 敎旨

親親齊 諱 居怡 敎旨

諱 居怡 配 宋氏 敎旨

諱 居怡 配 宋氏 敎旨

諱 居怡祖 筆跡

諱 居怡祖 筆跡

선산 :  보성군 조성면 봉능리 뒷산

선산 : 보성군 조성면 봉산리 뒷산

※ 선거이부대 명명식 링크 : http//cafe.daum.net/sun.jk/YEJu/171

梅谷(諱 宣世綱) 매곡 (휘 선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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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 安東營將(선 세강 호 매곡 행 안동영장)
贈 資憲大夫 兵曹判書(자헌대부 병조판서)
配 贈 貞夫人 平海吳氏(배 증 정부인 평해오씨)
后配 贈 貞夫人 仁川李氏(후배증 정부인 인천이씨)

公의 諱는 世綱이요 字는 士擧이며 號는 梅谷이라 고 하셨다. 公은 宣祖十年 丁丑(西紀一五七七年) 二月十日에 進 士 宣鳳章(字 季和)先生의 八男妹의 둘째 아들로 全 羅道 長興에서 탄생하셨다. 公의 집안은 代代로 벼 슬을 지내는 훌륭한 家門인 바, 始祖 宣允祉 先生은 高麗末期에 湖南按廉使로서 지 금 寶城地方에 侵入하는 倭寇를 소탕하시고는 이곳을 다스리시며 善政을 베푸셨고, 高麗가 滅亡함에 隱居하시면서 號 를 退休堂이라고 하셨다. 姓貫을 寶城으로 定하시고 이 곳에서 餘生을 마치셨으니 이로부터 後裔들은 寶城을 貫鄕으로 하여 繁盛하였으며 벼슬은 代를 이여 끊이지 않았다. 公의 七代祖 되시는 宣安景 先生은 定宗 때 文臣으로 奉常大夫 南原府使와 安東府使를 지내셨고, 六代祖 宣龜齡 先生은 太宗 때 文臣으로 奉列大夫 開城少尹과 寧邊府使를 歷任하셨으며, 五代祖 宣時中 先生은 號를 玉岩이라 하셨고 文章과 道學에 特히 조예가 깊으셨다.

世宗 때 通訓大夫로 綾城縣令을 지내시던 中에 淸白하시기로 當代에 名聲을 떨치신 분으로 벼슬이 올라 資憲大夫 工曹判書에까지 이르신 분이며, 憲宗十二年 丙午(西紀一八四六年)에 長興에 있는 褒忠祠에 配享되셨다.

高祖父 宣尙進 先生은 사마(司馬=진사와 생원으로 科擧에 合格된 사람)로 成宗 때 宣務郞 및 通禮院 左通贊을 지내셨고, 曾祖父 宣遇贇 先生(字 贇之,號 永慕齊)은 生員으로서 벼슬길에 나가시지 않았으며, 祖父 宣大倫(字 敦敍)先生은 明宗 때 司甕院奉事로 號를 養眞居士라고 하였으며, 글에 능하시어 文章으로서 名聲을 떨치신 분이다. 公의 아버님 進士公께서 年老하신 까닭에 官職에는 뜻을 두지 않으시고 家事를 돌보시며 奉養하니 孝誠이 至極하셨다. 公의 나이 二十七歲 되시던 해인 宣祖三十六年 癸卯(西紀一六〇三年)에 아버님 進士公의 권에 의하여 武科에 及弟하셨고, 光海君十年 戊午(西紀一六一八年)에 碧團僉使로 계시던중 滿期가 되어 歸嫁하셨다가 다시 京畿監營의 中軍으로 任命받으셨다. 永平山城을 구축할 때 公이이를 監督하셨는데 예상외로 빨리 完成되어 그 功으로 特進되시고 특히 임금으로부터 표창장까지 받으셨다.
그 後 洪州營將을 거쳐 安東營將을 歷任하실 때인 仁祖十四年(西紀一六三六年) 十二月에 丙子胡亂이 일어나, 淸軍의 侵入으로 서울이 위급하게 되자 仁祖大王께서는 廣州 南漢山城으로 피난을 하셨다. 그리하여 각지방에서 근왕병을 불러올릴 때 公은 慶尙監營의 中軍으로 任命되어 卽時 軍士를 領率하고 서울을 향하여 출발하셨다.
그 때 公을 모시고 따라가려는 셋째 아드님 척(滌)에게 부탁하시기를 『지금 國亂을 당하여 특명을 받았으니,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나의 所願이다. 너는 진영에 머물러 있으면서 본부와 연락하며 軍需를 잘 조달하여 위국진력하고 내가 사지에 부임함을 介意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다.
公은 慶尙左兵使 許完 및 右兵使 閔영과 같이 수천여명을 영솔하시고 수일 후에 雙嶺(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쌍령리)에 도착하여 진을 치게 되었다.
그런데 慶尙左兵使 許完이가 산골짜기에 진을 치자고 주장함에 公은 이를 반대하시면서, 『지금 정세로 보아 적은 수가 많은 데다가 기병들이고 우리는 수가 적은 데다가 보병들이니 산위에다 진을 쳐야 불리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니 주장되는 허완이가 다시 말하기를 『軍士를 움직이는 데 있어서는 비밀이 중요한데, 산골짜기에다 군사를 감추고 적군이 알 수 없게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면서 公의 말씀을 듣지 않고 골짝이에 진을 쳤다,
그러다가 그날 한밤중에 敵軍의 기습을 당하여 마침내 크게 패하고 말았으니 公의 先見之明을 實現하지 못한 것이 哀惜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敵兵은 불을 지르며 쳐들어옴에 미처 손을 쓸 사이도 없이 陣中이 어지러워져 마침내 大敗하자 上官인 許完은 자기의 失策으로 인하여 戰死하고 말았으며 後軍도 크게 패하고 말았다. 公은 이와 같은 進退維谷 중에서도 휘하병을 수습하여 활로 쏘고 칼로 치고 하여 닥치는 대로 무찔러 많은 敵兵을 꺾으며 限死力戰 하였으나 마침내 敵의 칼에 머리를 맞고 쓰러지셨다.
敵兵의 火攻중에서도 조금도 자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구刻의 命으로 運命하시려 할 때 官卒 毛里金 이 시체더미 속에 숨어 있다가 敵兵이 물러간 뒤에 公이 쓰러져 계신 장소로 달려간즉 칼을 손에 잡으신 채로 아직 運命은 하지 않으셨으나 정신은 역역하셨다.
毛里金이 公을 흔들며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뜨신 公께서 『네가 모리금이 아니냐, 시종 나를 구해 주니 참으로 義士이구나! 내가 죽 는 것은 한될 것이 없으나
軍隊가 이미 패하였으니 장차 나라일이 어 찌 될고!』라고 한탄하시면서 손에 잡고 계시던 칼을 毛里金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이칼은 永平山城을 쌓을 때 상감께서 下賜하신 칼이다. 소홀히 버릴 수 없는 것이니 네가 가지고 가서 우리 집사람에게 전해다오.』하시면서 조용히 運命하셨다.
公께서 殉節하시기에 앞서 公이 出戰하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故鄕집의 長男 오(澳)와 중자 정(渟)이 亂中에 公의 安候를 알기 위하 여 安東陣營으로 찾아갔다가, 軍隊가 패한 소식을 듣고 公께서 殉國하셨음을 추측한 형제들이 戴星奔哭 하는 때에 모리금이 어사검을 전하면서 哀哭하며 전투시의 상황을 자세히 말하고, 우리편 군사가 진쳤던 곳과 公 의 시신이 있는 곳을 도면으로 그려서 가르쳐 주었다.
始祖公 敎旨

梅谷 諱 世綱 敎旨

始祖公 敎旨

梅谷 諱 世綱 配 吳氏

수일 後 에 公의 아드님들이 도면을 가지고 雙嶺 戰鬪地까지 찾아가 본즉 과연 전군이 全滅하다시피 된 곳이라 시체가 산골짝을 덮다시피 널려 있었다. 그 속에서 公의 시신을 찾아본즉 얼굴은 생시와 같은데 머리에 족흔이 있고 가슴에도 화살맞은 자국이 여러 곳 있었다. 옷으로 얼굴을 덮었고 신으로 머리를 괴어 놓았으나 이는 모리금이 檢護한 까닭일 것이다. 公은 宣祖十年 丁丑(西紀一五七七年) 二月十日에 출생하여 仁祖十五年 丁丑(西紀一六三八年) 一月三日에 돌아가시니 享年六十一歲이시다. 公은 全羅道 長興郡 安良面 聖子洞에 안장되셨다. 公과 함께 戰死한 사람이 많 았는데, 그 중에서도 公의 시신만을 찾아서 매장하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公이 忠烈之士인 까닭이라고 감탄 하였다.
丙子胡亂이 끝난 후 仁祖大王이 그 義理와 忠烈을 가상타 하시고 褒典을 하사하심으로써 資憲大夫兵曹參判으로 贈職되셨다. 그리하여 장일에는 公의 銘旌을 증시한 관명으로 改書하여 그 忠烈을 표창하게 되니 國恩이 九泉에까지 달하였다. 哲宗壬戌에 資憲大夫兵 曹判書 知義禁府 訓練院事에 贈職되 셨다. 公의 정실되시는 貞夫人은 平海吳氏 항의 따님 이시며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오는 軍資監正을 지내셨고, 손자 증손들이 여럿으로 가세가 번성하였다. *五忠祠誌에서
○ 경기도 광주시 정축묘 사당에 諱 世綱 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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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축 묘 소재지 : 경기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 97-1
1636년(인조14)병자 호란 때 나라를 위하여 순국한 장군들의 절의를 기리고 제를 드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3번국도변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홍살문과 묘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는 “인조”를 구하기 위해 이곳 쌍령에서 청나라 군사들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허완을 비롯하여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민영, 영동영장 선세강, 공청도 병마절도사 이의배 등 4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2001년도에 광주시에서 수리하고 주변 정화작업을 하였다. 해마다 음력 초사흘에 광주문화원의 절차를 추진하고 대쌍령리 주민들이 협력하여 이 들의 충절을 기리는 정축묘 제례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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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님께서 경기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를 지나시다가 “諱 世綱祖의 장렬한 전사 얘기를 전해 듣고 세운 비석이 지금도 도로가에 세워져 있다 (경기도광주 종친회에서 관리 하고있음)

剛毅齊(諱 宣若海) 강의제(휘 선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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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 慶尙左水使(선 약해 호 강의제 행 경상좌수사)
贈 資憲大夫 兵曹判書(자헌대부 병조판서)
配 贈 貞夫人 光山金氏(배 증 정부인 광산김씨)

公의 이름은 若海요 字는 伯宗이고 號는 剛毅齊이다 始祖 宣允祉 先生은 高麗禑王九年(西紀一三八三年)에 湖南按廉使를 지내시고 號를 退休堂이라 하셨다. 高麗 末期에 先生께서 全羅道 伏忽, 兆陽地方에 侵入하여 百姓들을 괴롭히던 倭寇를 소탕하고 이 地方을 다스리 며 이곳에서 여생을 마치시니 이곳이 지금의 寶城이다. 그 後 이地方 주민들이 先生의 功勳을 追慕하여 祠堂 을 建立하였고, 자손들은 이 때부터 대대로 寶城에 살 게 되었으며 宣 氏의 貫鄕이 되었다.

公의 曾祖父 되시는 宣應禧 先生은 通訓大夫로 縣監을 지내셨고 祖父 宣迪 先生도 通訓大夫, 康寧縣監을 지내셨다. 아버님 되시는 宣義問(字 汝晦) 先生은 宣祖十八年 乙酉(西紀一五八五)年에 武科에 壯元으로 合格되시어 通政大夫로 潭陽府使와 大邱都護府使를 지내셨고 壬辰倭亂을 당하여 義兵將 崔慶長의 요청으로 그의 副將이 되시어 忠勇將 金德齡과 같이 南原, 咸陽, 昆陽, 泗川 등지에서 倭兵을 무찔러 많은 戰功을 남기신 분이다.

그때 구원병으로 온 明나라 장수 吳宗道가 감탄하여 선생을 가리켜 『孫吳의 兵略 이라고 칭찬하였다 하니 先生의 功績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壬辰倭亂이 끝난 後 宣武原從功臣으로 훈록 되셨으며, 光海君 때 嘉善大夫 兵曹參判으로 贈職되셨다.

公의 어머님 되시는 貞夫人은 光山金氏이신 데 僉使 金錫南의 따님으로 인자하시고 부덕이 높으신 분이셨다. 公은 宣祖十二年 己卯(西紀一五七九年)에 삼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성품이 强直하고 활달하시어 한 번 작성하고 決心한 일은 이해와 權勢로도 좌우되지 아니하셨으며, 또한 義理를 중히 여기시고 父母님에게는 孝誠이 至極하신 분이셨다. 일찍이 과거 보실 생각은 않으시고 世上일보다 부모님께 孝道만 하시며, 형편이 어려운 가사를 돌보시기에 전심전력하셨다.

그래서 아버님 되시는 府使公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어찌하여 과거 공부는 하지 않느냐? 하시고 걱정하시자 公이 대답하시기를 자제된 職分으로 여가가 없습니다. 하셨더니, 이에 府使公이 다시 말씀하시기를 世上에 立身揚名하는 것도 부모에게 孝道하는 것이니 일찍 과거를 보아 우리 집의 이름을 世上에 널리 알려 빛내도록 하여라 고 당부하셨다.
그리하여 公의 나이 二十七歲 되시던 宣祖三十八年 乙巳(西紀一六○五年)에 武科에 及第하시어 宣傳官 兼 備局郞에 任命하셨다. 三年동안 가난한 생계를 유지하시면서도 一身상의 榮達을 위하여 權門勢道家에 出入하여 엽관운동을 하지 않으신 분이다.
친구들이 公에게 生活이 어렵고 父親께서 年老하신데 昇進운동을 하는 게 어떠냐! 라고 권한즉 公은 잘 살고 못하는 것이 天命인데 분주히 哀乞하고 다니는 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라고 한마디로 拒絶하셨다 한다. 그리하여 公의 强直한 性格앞에는 누구도 감히 不正한 말씀을 올리지 못하였다 한다.
光海君二年 庚戌(西紀一六一〇年)에 아버님 喪을 당하시어 전후 十年간을 執喪하시다가, 脫喪하신 후에 다시 備局郞에 復職되셨다. 이 당시 우리나라 형편은 해마다 오랑케 들이 義州, 定州, 宣川, 鐵山 등 國境地方 을 侵犯하여 이 곳 百姓들은 항상 불안한 生活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淸나라(이 당 시는 이들을 오랑케로 불렀음)에서 使臣을 보내와 和親하기를 要請하니 朝廷에서도 當時事情으로는 이들의 淸을 물리칠 수 없어 할 수 없이 講和하였던 일이 있었다.
始祖公 敎旨

綱毅齊 諱 若海 敎旨

仁祖八年 正午(西紀一六三〇年) 봄에 오랑케의 使臣이 關西(平安道)地方에 와서 청포(청나라의 비단)를 판매하여 가지고 龍灣(義州)을 거쳐 돌아가는 도중에 明나라 軍士의 追擊을 받아 산길을 타고 도주하고 말았으며, 그 후에도 淸나라의 使臣이 義州까지 와서 우리 나라 朝廷에 國書를 전하려고 하는 것을 明나라 軍士가 미리알고 이를 저지하여 되돌아가고 만 일이 있었다.

이에 朝廷에서는 오랑케들이 憤怒할까 봐 두려워 慰問使를 파견하고저 인물을 물색하던 중 文武를 兼備한 公을 追薦하니, 仁祖大王께서는 쾌히 承諾하시며 당일로 慶尙左水使에 昇進시킨 후 즉시 출발할 것을 命하심에, 公께서는 王命을 받들어 다음날인 仁祖九年 辛未(西紀一六三一年) 四月三日에 연로하신 어머님을 작별하고 國書를 가지고 출발하셨다.* “淸나라와의 口舌 내용은 지면 관계상 생략”
公께서 한낱 武臣으로 강대한 淸나라 朝廷을 口舌로 꺽어 국가의 위기에서 구하고 국위를 선양하고 무사히 귀국하니 참으로 卿의 忠義之心이 기상하도다. 하여 金鞭, 貂구, 와 玉盃 등 많은 상을 하사하시고 卽日로 昇進시키셨다.
그 後 公께서는 어머님을 奉養하기 위하여 密陽에 下鄕하셨다가, 仁祖十二年 甲戌(西紀一六三四年)에 결국 모친을 여의시고 三年喪을 마치신 뒤에 다시 벼슬자리에 나가시어 平山府使를 제수 받으셨다. 任地로 떠나신 公은 鐵山, 定州地方에 난리를 겪은 百姓들을 무마하고 돌보아 善政을 베푸셨으며, 그 후 慶尙左道水軍節度使를 지내셨다.
公께서 任地에서 병환으로 돌아가실 때에 『내가 나라에 恩惠로 父母를 奉養하였으나 그 恩惠를 보답하지 못하였다.』 하시면서 세수하시고 衣冠을 단정히 하신 후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신 뒤에 다시 자리에 누우시고는 조용히 눈을 감으시니, 이날이 仁祖二十一年 癸未(西紀一六四三年) 五月十日이었으며, 이때 公의 수는 六十五歲이셨다.
公이 돌아가신 다음해 즉 仁祖二十二年 甲申(西紀一六四四年)에 明나라가 淸나라에 게 滅亡되었으며, 그로부터 이제 九十五年이 되었다. 哲宗壬戌에 嘉善大夫 兵曹參判 兼 同知義禁府 事 訓練院都事에 가증되셨다.
綱毅齊 諱 若海 配 金氏

綱毅齊 諱 若海 敎旨

公의 가승이 없어져서 公의 經歷을 이 이상 더 상세히 말할 수 없으나, 公께서 口舌로서 강호(淸나라)를 꺽으신 瀋陽日記를 한 번 읽으면 누구나 衣冠을 바로잡고 敬意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장 하도다 ! 公께서 明나라가 滅亡하는 것을 보지 않으시고 그 전에 돌아가신 것은 公에게 다행한 일일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公의 正室되시는 貞夫人 光山金氏는 資憲大夫 戶曹判書 金志의 따님이시고, 장남 접(字 君涉)은 光海君 二十年 庚申(西紀一六二○年)에 武科에 合格되시어 濟州牧使를 지내셨고 膝下에는 모두 七兄弟를 두셨다.* 五忠祠誌에서
※ 산소 : 전남순천시 외서면 화전리 부산골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