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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충의사

울산 충의사

임진왜란 시 울산전투에서 순절하신 諱 克禮祖(휘 극례조)께서는 선무원종1등공신에 錄勳(록훈)되셨으며 이곳에 奉安(봉안)되셨습니다.

울산시는 선조들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1997년 7월 사당 건립에 착수하여 2000년 6월 경역에 사당 외 건물 9동과 홍살문을 완공하고 ‘충의사’라 이름 했다. 사당에는 울산 의사 239인의 위패를 봉안했으며, 이름 없이 산화한 의사들을 위해 무명제공신위(無名諸公神位)를 함께 봉안이 되었다, 제향은 춘(양력 4월15일), 추(10월15일)로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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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임란의사 사적비

오호라 하늘과 땅이 열린 이후에 처처(處處)에 생령이 번영함은 자연의 섭리이거니와 단군 이래로 누천년간 제각각의 생업으로 복록을 누려오던 이 땅에 난데없는 왜적의 침범으로 인해 국토가 초토화되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 허덕이게 된 것은 어떤 연고였던가. 국토의 동남단 해안에 위치한 이곳 울산은 조선 초부터 경상좌병사를 상주시켜 국방을 강화하고 왜에 염포를 개항하여 평화적인 교역을 하였던 곳이다.

조선 왕조는 유학에 바탕한 왕도정치를 내걸고 학문과 예의를 존숭하여 외세와 큰 마찰 없이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왜는 선조 25년(서기 1592년) 4월 14일 이십여 만의 대병력으로 우리 민족사상 가장 치욕적인 임진왜란을 일으켜 쳐들어왔다. 왜적이 갑자기 부산진으로 침입하자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은 울산군수 이언성(李彦誠)과 함께 동래성으로 출전하였으나 적세에 놀라고 군수마저 체포되자 되돌아오고 말았다. 최전선에 위치한 울산 병영성(兵營城)에는 진관체제(鎭管體制)에 따라 영남 13개 고을의 관군이 모였으나 좌병사가 탈출하여 힘없이 함락되고 말았다.

왜의 주력부대는 경주를 거쳐 북진하고 병영성에 주둔한 왜적이 약탈, 살상 등 만행을 자행하자 울산의 의사들은 4월 23일 충의 일념으로 기박산성에서 창의 거병하여 의병 항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분들은 경주의 의병과 함께 병영성을 급습하여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고 이어 요새지인 공암(孔巖), 달현(達峴), 전천(箭川), 사자평(獅子坪), 개운포(開雲浦) 등에서 익숙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왜적을 격파했으며 경주읍성 탈환전 등 항왜 구국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조정은 9월 의주에서 경상좌병사 박진과 울산군수 김태허를 임명하고 서면장(西面將)에 박홍춘, 남면장(南面將)에 전응충, 주사장(舟師將)에 서인충을 각각 삼아 울산 의병진의 지휘체계를 확립하였다. 선조 26년 4월 한성회담으로 서울에서 쫓겨난 왜적은 난초부터 구축된 서생포를 비롯한 남해안에 13성을 쌓아 울산지역에 왜적을 증가시켰다. 그래서 국지전이 더욱 치열해지자 울산 의병진은 진지를 일단 경주로 옮겨 안동까지 다니며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해 7월 의병들은 서생포성에 진을 치고 있던 아사노 초키치(淺野長吉) 부자 등이 이끄는 왜적을 태화강에서 격퇴하고 울산성까지 되찾는 전과를 올렸으며 울산, 경주, 언양, 장기, 연일, 영천 등의 의병장 67명이 모여 태화강가에서 구강회맹(鷗江會盟)을 다졌다. 이들은 경주 문천회맹과 대구 팔공산회맹, 창녕 화왕산회맹에 적극 참여하였고 조 · 왜 서생포 회담에도 우리 대표를 파견하였다.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정유재란을 일으킨 왜적이 경기도 소사에서 패하자 왜장 가토 가요마사(加藤淸正)는 울산도산(島山,지금의 학성왜성)에 철옹성을 쌓고 항거하였다.

울산의 왜병들은 조명연합군과 함께 왜적의 최후보루인 도산성을 포위하여 왜적으로 하여금 말 오줌을 마시며 연명하게 하는 등 그들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마침내 왜적은 패퇴하고 전란은 끝이 났다. 울산의 의사들은 무수히 전사하고 부상당하면서도 혼연일체가 되어 병영성 등 11진을 베풀고 21회전(回戰)이나 용맹 분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어전회의에서 수차 거론되었고 명나라 장군마귀도 이들 의사의 단충(丹忠)을 기리기 위해 서생포성에 창표당을 지었다

선조는 어사 이상신을 파견하여 정황을 조사 보고케 하면서 ‘너희들이 아홉 번 죽었다가 한 번 산 것 같이 우리나라도 망했다가 다시 살아나 강토를 보존하게 되었다. 이것은 너희들이 일찍이 의기를 떨쳐 앞장서지 않았다면 나라의 남쪽을 잃은 지 오래였으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관찰사 한준겸을 보내 선유기사를 반포케 하고 울산의 의사 165인에게 술과 포목을 특별 하사하여 노고를 치하하였다. 결국 울산의사들의 이러한 공로는 높이 평가되어 울산은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제 임진왜란이 끝난 지 사백 수년이 지난 오늘 울산 임란의사를 모실 충의사를 지어 자랑스러운 우리 의사들의 사적을 밝히는 것은 자손만대 이르도록 충의단충을 본받아 국가발전에 큰 기여가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