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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선씨 유래

시조공 퇴휴당 선생(始祖公退休堂 先生 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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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의 姓은 宣이고 諱는 윤지(允祉)요 字는 傳하지 않으며 貫은 寶城이며 號는 용암(龍菴) 또는 퇴휴당(退休堂)이라 한다.
先生께서 寶城宣氏의 시조 (始祖)가 되시며, 中國으로부 터 우리 나라로 들어오시기까지의 그 先蹟(선적)은 춘추전(春秋傳)에 대략(大略) 기재(記載)되어 있는바, 그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二八,○○년 前 中國 春秋戰國時代인 노(魯)나라 때에 이름은 시평(始平)이며 字는 징음(徵音)이라고 하는분이 대부선백(大夫宣伯)이란 벼슬을 지내셨는 바 그 시(諡) (宣)字로서 姓을 삼으셨으니 이분이 宣氏의 元祖가 되시는 분이며 後에 진(晋)나라에 초빙(招聘)되어 한기(韓起)라는 곳에서 거처(居處)하시면서 통역상(通易象)이라는 책 二篇을 저술(著述)하여 그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분이시다.(魯나라는 孔子께서 出生한 나라임)
그後 後孫되시는 선양(宣襄) 先生은 周나라 末期에 대상(大常)이 되셨으나 벼슬을 버리시고 사집(師執) 사양(師襄)이란 사람과 같이 海西라는 곳에서 은거(隱居)하셨으며, 漢나라 末期에 이르러 대홍로(大鴻矑) 선여학(宣汝學) 先生의 아들인 선병(宣秉 字 巨公) 先生도 운양(雲陽)이란 곳에 居住하시면서, 田園을 조용히 산책하시며 自然과 讀書를 벗삼고 어지러운 세상에는 나가지 아니하셨다.
그뒤 왕망(王莽)이 스스로 태부(太傅)가 되어 안한공(安漢公)이라고 稱하면서 집권(執權)할 때, 先生에게 여러 번 官職에 나올 것을 권하여도 不義한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다고 하시며 이에 응하지 않았던 바, 그 後 유수(劉秀)가 왕망의 軍士를 곤양(昆陽)에서 격파(擊破)하여 왕망을 죽이고, 漢室을 復興시켜 後漢을 세워(西紀二四年) 광무황제(光武皇帝)가 되고 낙양(洛陽)에 首都를 定하여 즉위(卽位)한 뒤 先生의 名聲과 節介가 있음을 듣고 현훈안거(玄纁安車)로써 영접(迎接)하여 어사(御史)에 任命하였다가, 사률상서(司律尙書)로 轉任케 하니 당시에 경사(京師/서울)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先生을 우러러 삼독좌(三獨座)라고 불렀다 한다.
그 後 선려한(宣慮漢) 先生은 스스로 유도(儒道)를 닦으시고 『노자도덕종시일권.老子道德終始一卷』이라는 책을 著述하시어 그 이름이 世上에 널리 알려졌으며, 이 분의 동생 되시는 선명한(宣明漢 字 南仲) 先生은 공사(貢士)로 벼슬을 내놓고 장정(長汀)이란 곳에 居住하시면서 城안 南쪽에 있는 바위 밑에다 집을 짓고 조용히 讀書를 즐기면서 退休하고 계셨던 바, 그 當時 그 고을 郡守로 있던 사주(謝椆)라는 사람이 그 바위를 가리켜 『宣岩』이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그 後 東漢末期부터는 文獻 상으로 傳하여 오는 것이 없다가, 宋 나라 欽宗때(高麗仁宗四年/丙午 (西紀一一二六年)에 선찬(宣贊) 先生이 청소사 가 되시어 皇帝의 特使로서 高麗에 들어오신 일이 있었고, 그 뒤 二二三 年 後 元나라 末期인 順帝/十七年(元至正九年/己丑 高麗忠定王 一年/西紀一三四九年) 閏六月에 宣使黨 先生께서 중서(中書)로 高麗에 들어오신 일이 있었다.(이 해 十月에 高麗의 恭愍王이 王이 되기 前 江陵大君때 元나라에서 衛王의 딸 魯國公主와 結婚함)
같은 順帝二四年(高麗恭愍王五年 西紀 一三五六年) 二月에는 宣天桂 先生이 元나라 皇帝의 命 을 받고 판도총랑(版圖摠郞)으로서 高麗恭愍王에게 衣服과 술을 바치고 돌아간 일이 있다.그로부터 十二年後 인 明나라 初期에(高麗恭愍王/十七年 戊甲 西紀 一三六八年) 宣天桂 先生이 明나라 太祖에 命을 받고 또다시 高麗에 왔다가 그대로 松京(지금의 開城)에 머물러 살게 되셨다. 그러나 先生의 遺蹟이 高麗史에 傳하지 않으니 섭섭한 일이다.
以上이 寶城宣氏의 始祖以前의 大略이며, 始祖되시는 宣允祉 先生은 雲陽의 정절(貞節)을 繼承하고 장정(長汀)의 숙기(淑氣)를 이어받어서, 二十歲란 약관(若冠)으로 大明殿試策(지금의 高等考試와 같음)에 壯元으로 合格하시니, 元나라 皇帝가 불러 보시고 그 人品됨이 神人의 풍채 같다고 극구 칭찬하며 서대(犀帶-관복에 두르는 띠)와 인검을 下賜하시는 同時 문연각학사(文淵閣學士)에 任命하셨다.
先生은 性格이 총명하고 영리하여 十三歲 때에 벌써 文章으로서 이름이 났고, 十五歲 때에 孔子의 大學之道에 通達하셨는데 大學之道에 가르치는 正心, 수신(修身)으로부터 格物, 치지(致知)에 이르렀으며, 항상 말씀하시기를 선비된 자가 處世하는 데에는 忠孝를 첫째로 하고 武藝를 둘째로 하여야 하며, 항상 효경(孝經)과 곡례(曲禮)와 內則 等篇을 외우라 고 하셨다. 또한 활쏘기는 六藝中의 하나라고 하시며, 향례(鄕禮)에 있어서 불가불 알아야 한다고 强調하셨다.
當代에 이름난 선비들과 같이 확상(矍相)이란 곳에서 회유(會遊)하시며 하루종일 과녁에 맞힌 화살을 세어 보니 하나도 빗나간 것이 없었다고 한다. 관중(觀衆)이 다들 말하기를 先生의 德을 보려고 하면 이런 機會가 다시 없다고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하니 이것이 孔子가 말씀하신 소위 불실정곡(不失正鵠)이라는 것이다.
本貫 寶城은 全羅南道 남부 중앙에 위치한 地名으로 본래 百濟의 복홀군(伏忽郡)인데 新羅 景德王이 寶城郡으로 고쳤고, 高麗 太祖는 三陽郡이라 하였으며, 996년(成宗15年)에 패주(貝州)로 개칭 하였다가 1668년(현종9년)에 전라도에 소속 되면서 다시 寶城郡이 되었다. 宣 氏는 中國 魯나라 大夫 宣伯의 後裔로 傳한다.
우리나라 宣 氏는 明나라 때 文淵閣學士인 宣允祉(號:退休堂) 先生이 1382年(高麗禑王八年) 使臣으로 高麗에 왔다가 歸化하여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가 해안 지방에 侵入하여 우거(寓居)하는 왜구를 섬멸하고 민생을 안정 시켰으며, 조선이 開國 되자 벼슬을 버리고 全羅南道 寶城 에 隱居한 것이 시초가 된다. (五忠祠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