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출처 : 광산이씨 홈페이지
필문 공公이 1453년에 돌아가시니 그 당시에 만들어 1454년에 만산동 선영에 관과 함께 묻어진 금석문으로 그동안 우리 문중에 전해오던 몇 가지 기록이 이 묘지墓誌에 의하여 정정되었다.
선생의 다섯 아드님 차례가 장남 시원 다음에 딸이 있었고 차남 청심당이 三남으로 四남 제학공 찬원이 차남으로 되었으며 필문 공公의 출생과 졸의 연대가 확실해졌으며 선생의 부 일영日英자로 기록되어 있고 정부인 선씨도 판사 윤지 여女로 기록되어 보성 선씨 문중에 새로운 사실을 밝혀 준 바가 있다.
(동아일보 1998년9월2일기사)
이 묘지墓誌는 1998년 묘를 3단 둘레석으로 단장하는 작업 중 발견되어 누군가에 의해 분실되었고 당시 고古미술협회 부회장 김태형 등 2명이 일본으로 밀반출하려다 김해공항 문화재 감정관실 양맹준에게 저지당하자 한 달 뒤 김포공항을 통하여 반출되었고 일본 골동품상에 5백만 엔(한화 약 5천만 원)을 받고 판 것으로 확인되었다. 당시 양 감정관은 묘지墓誌의 겉모양과 내용을 기록하여 문화재 관리국에 제보하여 학술연구만은 가능하게 하였다.
이 사실이 지상에 보도되자 문중과 나주 오산 이재수님이 중심이 되어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보상문제와 여러가지 여건으로 찾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비통한 일이다.
우리 문중을 비롯하여 국가적인 보물인 이 묘지墓誌 되찾을 날을 기대해 본다.
※묘지墓誌:죽은 사람의 경력, 사적 생몰 년 월 일 자손의 성명 등을 새겨 무덤 옆에 파묻은 돌 또는 돌판 묘墓 주소지를 새긴 글(필문 공公 묘지墓誌는 분청사기 상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