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헌공실기 1864년 2차 추록 평양공 행장
(문헌공실기 74面)
(문헌공실기 75面)
◇ 일두속집 제1권 1919년 선평양공 행장
◇ 선 평양공(宣平襄公)의 행장[정여창(鄭汝昌)]
공(公)의 성(姓)은 선(宣)이고, 휘(諱)는 형(炯)이며, 자(字)는 명여(明汝)이다. 비조(鼻祖)의 휘는 윤지(允祉)인데 황조(皇朝)의 문연각 학사(文淵閣學士), 본조(本朝)의 행 호남관찰사(行湖南觀察使)를 지냈으며, 호는 퇴휴당(退休堂)이다.
증조(曾祖)의 휘는 안혁(安赫)인데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광유(光裕)인데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고 행 안악군수(行安岳郡守)를 지냈다.
고(考)의 휘는 화(和)인데 숭록대부(崇祿大夫) 우찬성(右贊成)에 추증되고 행 용천 군수(行龍川郡守)를 지냈다.
공은 선덕(宣德) 9년 갑인(1434, 세종16) 8월 15일 오시(午時)에 태어났다. 부친 찬성공이 일찍이 이르기를 “이 아이는 조정의 그릇이 될 것이다.” 하였다.
어릴 때부터 대인(大人)의 뜻이 있어 먼저 예법을 익히고 활쏘기까지 잘하여 기국(器局)이 작지 않았는데, 체구가 장대하고 성채(星彩)가 자리에 빛났으며 풍도(風度)가 출중하였다.
문종조(文宗朝) 경태(景泰) 2년 신미(1451, 문종1)에 무과(武科)에 오르니, 당시 나이 18세였다. 상이 공의 괴걸찬 모습을 보고 그 선세(先世)에 대해 묻자, 승지가 아뢰기를 “황조의 문연각 학사 선윤지(宣允祉)의 후예요, 전(前) 군수 선화(宣和)의 아들입니다.” 하니, 상이 감탄하여 이르기를 “네가 충렬(忠烈)의 자손으로 이처럼 헌걸차니, 사직(社稷)의 그릇이 될 것이다. 너는 모름지기 힘쓸지어다.” 하고, 곧바로 선전관 겸 비국랑(宣傳官兼備局郞)에 제수하였다.
이듬해에 온성부사(穩城府使)로 있다가 조정에 들어가 승지가 되었는데, 작은 관직을 두루 맡았을 때에는 그 기이함을 알지 못하였다. 우리 세조조(世祖朝) 성화(成化) 3년 정해(1467, 세조13) 5월에 길주(吉州)의 역적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공이 황해도 관찰사로서 명을 받들고 토벌하였다.
진(陣)에 임하여 공이 군중(軍中)에 영을 내리기를 “역적의 무리가 감히 하늘을 쏠 꾀를 내어 황지(潢池)의 군사를 훔쳐 희롱하니, 이것은 천고에 없는 대역(大逆)이다.” 하고, 채찍을 휘두르고 북을 울려 진군(進軍)하여 좌우로 협공하니, 적병이 크게 무너졌다.
공이 승승장구하여 역적을 모조리 섬멸해 한 달 만에 세 번의 승리를 거두니, 대란(大亂)이 드디어 평정되었다. 9월에 개선(凱旋)하니, 상이 적개공신(敵愾功臣)에 포록(褒錄)하고 유성군(楡城君)에 봉(封)하였으며,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 판서로 올렸다.
성종조(成宗朝) 성화(成化) 7년 신묘(1471, 성종2)에 이르러 충청도 관찰사로서 두 번째로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록(參錄)되어 형조 판서에 올랐고, 공신 녹권(功臣錄券)을 하사 받고 호조 판서와 좌찬성(左贊成),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다. 성화 15년 기해(1479, 성종10) 1월 13일에 졸(卒)하였다. 시호(諡號)는 평양공(平襄公)이다. 동년 3월 22일에 금천(衿川) 봉천면(鳳川面) 탑립동(塔立洞) 묘좌(卯坐)에 예장(禮葬)하였다.
아, 공의 평생 지조와 행실은 충효(忠孝) 두 글자뿐이었다. 다급하고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터럭 하나 꿈쩍하지 않았고, 혹한이 몰아치고 장맛비가 쏟아지는 때에도 걸음걸이가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으니, 실로 이는 길보(吉甫)의 문무(文武)이고, 제공(祭公)의 아량(雅量)이었다. 그렇다면 장군(將軍)의 큰 깃발이 공의 영광이 될 수 없고 황금과 백벽(白璧)이 공의 공(功)이 될 수 없는 만큼, 금석(金石)에 입히고 이정(彝鼎)에 새길 만하다. 공의 영령(英靈)이 지금까지 스러지지 않아 유상(遺像)을 우러러보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숙연히 공경심을 일으키게 한다.
아, 공의 자손이 마땅히 공의 유택(遺澤)을 누려야 할 것이니, 공이 이미 세상에 드문 기운으로 세상에 명성을 떨쳤던 만큼 아마도 그 자손 가운데에 그 업적을 이을 이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천리(天理)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다.
내가 선씨(宣氏)의 외파(外派)로서 공의 위의(威儀)를 보지 못하고 공을 가까이 따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그러나 비단 여러 사람이 공을 칭송하는 말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의 훈계 가운데에서 들은 것이다.
성화 임인(1482, 성종13) 1월 상한(上澣)에 외손(外孫) 하동(河東) 정여창(鄭汝昌)은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