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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작성일 : 16-11-30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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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문의 조선왕조시록과 승정원일기
연도 : 1585 관련되신 분 : 선의문
편저자(저자) : 소장처(관련) : 한국학중아연구원
[무과] 선조(宣祖) 18년(158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1[壯元]위(1/31) 출전 : 『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
(1585년 식년시 무과 방목, 선의문 장원)
[진사시] 예종(睿宗) 1년(1469)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70위(100/100) 출전 : 『성화기축6년9월일생원진사시방(成化己丑六年九月日生員進士試榜)』(고려대학교 도서관)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의 자료에 따르면 1469년에 진사에 급제한것으로 되어있으나 121살에 무과시험을 보았다는 것은 모순이 있다. 동명이인이거나  또는 자료의 오류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Cap 2016-11-30 16-01-56-174.jpg

 
□진도군수 선생안
宣義問 丁酉七月十二日到任 庚子二月二 十八日瓜歸 (1597년7월12일 ~ 1600년2월28일)
□조선왕조 실록 기사
1) 선조 74권,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4월 9일(을사) 2번째기사사간원에서 낙안 군수 선의문이 용맹이 없는 겁장이이므로 파직을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낙안 군수(樂安郡守) 선의문(宣義問)은 임진란이 일어난 초기에 공주 판관(公州判官)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영로(嶺路)를 수비하고 있었는데, 적이 이르기도 전에 풍문을 듣고 먼저 도망쳤습니다.
그가 용맹이 없는 겁장이임을 알 수 있으니, 연해의 중요한 지대를 다시 맡길 수 없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공산지(공주읍지) 선생안)
 
Cap 2016-11-30 16-02-07-511.jpg

 
2) 선조 112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윤4월 6일(갑신) 1번째기사. 유격 이천상을 접견하다
유격 이천상(李天常)이 왔다.【수병(水兵)의 유격이다. 이덕형(李德馨)의 장계 내용에 탐욕스러워 일로에서 작폐한 자라고 한 인물이다. 사사로이 남방 백성을 시켜 자기 공을 칭송하게 하였으니,
그 사람됨을 알 만하다.】 상이 시어소에 나아가 접견하였다. 천상이 말하기를,“귀국이 8년 동안 침략을 당해 피해가 많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천조(天朝)의 힘을 의지하여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이외다.”하였다.
천상이 말하기를,“조선은 대국의 속방이니 군대를 출동시켜 와서 구원한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지금은 동방의 일이 완료되었기에 속히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고금도(古今島)에 있을 때 군민이 다 유임을 원했으므로 이제야 올라왔습니다.”하고, 진도 군수(珍島郡守) 선의문(宣義問)의 정장(呈狀) 1통을 내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 [후략]
 
3) 선조 176권,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7월 15일(갑자) 2번째기사적선과 싸워 공을 세운 이정표 등에게 가자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이정표(李廷彪)가 장수들을 독려하여 거느리고 원근의 섬들을 두루 순찰하다가 갑자기 적선(賊船)을 만나는데, 군율(軍律)을 엄하게 하고 외양으로 이동해 싸워서 한 배에 탔던 적을 죄다 죽여 34급(級)을 헌괵(獻馘)했고 중국인과 우리 나라 사람 및 왜노도 사로잡았으니,
공적이 가상합니다. 장수들 가운데에 발포 만호(鉢浦萬戶) 김성옥(金成玉), 전 부사(府使) 선의문(宣義問)은 한마음으로 일을 함께 하여 목숨을 걸고 힘껏 싸웠으니, 그 공은 전적으로 이 두 사람에게 있는 것으로 또한 가상합니다. 그밖에 군공(軍功)이 있는 사람도 모두 해조로 하여금 급속히 상고하여 규례에 비추어 논상(論賞)하게 하고, 전사자들에 대해서도 모두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도록 감사(監司)에게 이문(移文)하소서.
군사에게 음식을 먹여 위로하는 일은 통영(統營)과 마찬가지로 거행해야 할 듯합니다만 은전(恩典)에 관계되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위에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아뢴 대로 윤허한다. 이정표는 가자(加資)하라. 또 근신(近臣)을 보내어 군사에게 음식을 먹여 위로함으써 가장(嘉奬)하는 뜻을 보이고, 김성옥·선의문에게도 모두 가자할 것인지를 의논하여 아뢰라.”하였다. 
가자(加資) : 정3품(正三品)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以上)의 품계(品階) ②정3품(正三品)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以上)의 품계(品階)를 올리던 일
[ 난중일기에 진도군수로 노량해전 참전 사실이 나온다.,  임진란이 끝나고 한참 후에 그 공적을 인정받았다고 보았는데 여기서 적선은 왜적인지 아니면 양인선인지 구분이 안된다. 1604년7월에 통영에서 캄보디아 왕국의 중무장무역선을 조선군이 나포한 사실이 전한다.]
승정원일기 (영조 1년 을사(1725, 옹정3))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좌찬성 최경회(崔慶會) 등에게 시호와 포상의 은전을 내려 주기를 청하는 전라도 생원 이만영(李萬榮) 등의 상소
[전략] ~~ 계사년(1593) 6월에 최경회가 진주에서 의롭게 죽자, 나라를 걱정하는 것과 개인적인 슬픔을 둘 다 차마 잊을 수 없어서 비록 나이가 많고 근력이 쇠진하지만 오히려 분연히 동생을 이어서 의병을 일으켜 그해 8월에 최경회의 남은 무리를 모아서 피눈물을 흘리며 군사들과 맹세하며 영남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대로 행조(行朝)에 글을 올리고 도내에 격문을 전하니 몇 달이 되지 않아 주군(州郡)에서 향응하였습니다. 도원수 권율(權慄)이 조정에 장계로 보고하고 비변사에서 그 뜻을 아뢰기를 ‘아우는 나라를 위해 죽고 형이 또 뒤를 이어 의병을 일으키니 옛사람에게서도 그 짝을 찾기 드문 경우입니다.’라고 하니,
상께서 가상하게 여기고 장려하며 그날로 특별히 장악원정에 제수하고 계의병장의 인수를 겸하여 주며 면려하셨습니다.
또 본도의 감사에게 전교하시어 마음을 함께하여 협력하라고 하였으며 또 해당 관사에 전교하시어 관문을 만들어 감영과 본진(本陣)에 나누어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최경장은 명을 받들고 감격하여 더욱 한결같은 충정을 독려하여 옥과현(玉果縣)에 주둔하고 방책을 세워 훈련원 부정 선의문(宣義問)을 부장으로 삼고, 서천 군수(舒川郡守) 김윤명(金允明)을 종사관으로 삼아 의병들을 격려하여 이끌고 전진하여 고성(固城)의 견내량(見乃梁)을 막아 지켰습니다.
얼마 후에 원수(元帥)의 관문(關文)으로 인하여 군사를 석주(石柱)로 이동시키고 시설과 구획을 모두 알맞게 하니 기계와 병량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미처 적을 만나지는 않았으나 휩쓸렸던 것을 회복하고 적을 베어 버린 공이 있었으며, 저 약탈을 일삼던 추한 오랑캐도 그가 최경회의 형인 것을 알고는 풍문을 듣고 겁을 먹어 무기를 거두고 물러가 피했습니다.
그해 12월에 왕세자가 분조(分朝)를 세우고 전주(全州)에서 무군(撫軍)하니 최경장이 즉시 달려 나아가 사은하였습니다. 그때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이 담양(潭陽)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아직 군졸이 없었습니다. 이에 무군사(撫軍司)에서 조정에 계문(啓聞)하여 계의병의 무기와 병량을 모두 김덕령에게 옮겨 주라고 하였으니, 대개 최경장의 나이가 이미 망칠(望七)이라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싸우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에 최경장은 그 병량을 모두 수송해 주고 그 진호(陣號)를 파하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최경장이 능히 한번 전공을 세울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의병을 일으킨 날에 죽지 못하여 당시에 의병을 일으킨 선비와 같이 포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충성과 효도가 다른 사람보다 못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