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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작성일 : 16-11-30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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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동 72현
연도 : 1809 관련되신 분 : 시조공
편저자(저자) : 소장처(관련) : 국립중앙도서관
□ 두문동 72현 유래
 
‘두문동 72현’으로 불리는 고려수절신(高麗守節臣)에 대한 당대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조선후기 영조대(英祖代)에 와서야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이 최고조에 이르면서 거론되기 시작하였고 비밀리 또는 구전으로 전해오던 고려수절신에 대한 기록도 성리학자와 후손들에 의해서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두문동이라 하면 72현으로 세상 사람들은 알고 있으나 이조 헌종 정미년(1847)에 간행한 두문동서원지에 보면 120현이라 하였는데 개성부 종봉산 아래 동두문동 48현이 있고, 개성부 만수산 아래 서두문동 72현이 있어서 합봉 120현이라 하였다.
세상에는 서두문동 72현이 元운곡 소장 서첩에서 먼저 발견되어 소문이 세상에 알려졌다 한다. 이성계가 조선왕조(朝鮮王朝)를 개창하자 고려의 조신들은 새 왕조에 출사를 거부하고 두문동에 은거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개풍군지(開豊郡誌)에 따르면 두문동(杜門洞)은 본래 북녘 땅 개풍군의 지명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개성 송악산 서쪽 자락 만수산과 동쪽 보봉산(寶鳳山)에 각각 두 곳의 두문동이 있었다.
만수산의 西두문동에는 고려의 문신(文臣) 72인이 은둔했고, 보봉산(寶鳳山)의 東두문동에는 무신(武臣) 48인이 숨어 살며, 고려에 충성을 다짐하고 새 왕조에 출사를 거부하였다. 이성계가 왕사(王使)를 보내서 마음을 돌리도록 설득하였으나 그들이 거부하자 화가 난 이성계가 왕명으로 동, 서 두문동을 에워싸고 섶을 쌓은 다음 불을 지르며, ‘너희 중에 백이, 숙제와 같은 사람이 몇명이나 되는지 보자’하였으나
西두문동에 있던 고려의 문신(文臣) 72인과 東두문동에 있던 무신(武臣) 48인은 불길 속에 안좌하여 모두 다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이 참혹한 화형에 대한 일은 전해질 수가 없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세신정(洗身井, 같이 죽기로 맹세하면서 몸을 씻었던 우물)이란 것도, 회맹대(會盟臺, 충성을 맹세하던 장소)란 것도 그 당시에 있었던 것인데 모두 두문동 안에 있었다.
1809년(순조 9년)에 당시 72인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의 후손이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에는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골짜기에 있다. 고려의 문신(文臣) 72인이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이라는 고개에서 조복을 벗어 던지고 이곳으로 들어가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선왕조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고려충신들을 불살라 죽였다고 전해진다’는 기록이 있다. 훗날 성리학의 ‘의리 명분론’이 강화되던 시기인 1751년(영조 27년)에는 고려에 절의를 지킨 두문동(杜門洞) 충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두문동비(杜門洞碑)를 세우게 하였다. 영조(英祖)가 1760년 9월에 후릉(조선 2대 정종과 비 정안 왕후의 능) 참배차 개경(개성) 부근 동남쪽의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를 넘을 때의 일이었다.
영조가 지명의 연유에 대해 묻자 신하들이 조선 태조가 즉위한 직후에 고려의 유신(儒臣)들이 개경 동남쪽 고개에 올라 출사를 거부하고 이 고개에 조회 때 쓰는 관과 조복을 소나무에 걸어놓고 뿔뿔이 흩어지므로 ‘조회하지 않는 재’라는 뜻으로 부조현(不朝峴)이라고 칭하며, 부조현(不朝峴)을 지나면 두문동(杜門洞)이 있다고 했다.
이에 영조는 그들을 기려 그 해에 부조현비(不朝峴碑)를 세우게 했다. 두문동 72현의 명단이 72명인 것은 1751년(영조 27년)에 두문동 충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두문동비를 세우게 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두문동 72현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두문동 72현의 최초 문헌은 고종 9년(1872년)에 나타난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荇)의 후손이 편찬한 문집(文集) ‘기우집(騎牛集) 임신본(壬申本)’이다. 그리고 두문동 72현을 새롭게 꼽은 또 다른 문헌은 1924년에 강호석이 철종 11년(1860)에 간행된 ‘화해사전(華海師全)’의 명단을 참조해 작성한 ‘전고대방(典故大方)’이란 인물지(人物誌)다. 물론 두 문헌은 명단에서 큰 차이가 있다.
겹치는 인물이 30명이고, 42명이 서로 다르게 선정되어 있다. ‘기우집(騎牛集) 임신본(壬申本)’은 정몽주를 중심으로 고려 말 충신들을 포괄적으로 선정했고, ‘전고대방(典故大方)’은 두문동에 들어갔던 시기를 중심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정사(正史)라고 할 수 있는 규장각충렬록(奎章閣忠烈錄)중 ‘두문동 제선생실기’에 의하면 ‘고려말 충신중 입절사의(立節死義, 마지막까지 절개를 지키고 죽은 사람)한 분들이 많았고 그 나머지는 산거야처(山居野處)하여 두문병적(杜門屛跡)하였거나, 혹은 벼슬을 주어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스스로 정절을 지킨 분을 통칭 두문동 72현이라고 하니 대개 그 뜻이 같다고 하여 통칭하였을 뿐이지 반드시 개성 두문동에서 함께 은거하였다는 말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여조충렬록(麗朝忠烈錄) 발문(跋文)에도 ‘중국으로 들어가 마친 바를 알지 못하고, 먼 땅에 유배되었다가 유환(宥還)되지 못한 분이라도 두문동에서 동은(同隱)한 제현(諸賢)과 같으니 두문동에서 은거한 분이 그 수사 72인에 미만(未滿)하여도 통칭 두문동 선생이라고 지금까지 전한다’라고 하였다.
 고려숭의회(高麗崇義會)가 발표한 72현은 무려 3백70여현이고 이미 순절한 충신까지 합하면 4백60여현에 이르고 있다. 두문동서원지(杜門洞書院誌)와 승국명류표방록(勝國名流漂傍錄)은 그 인원을 1백16인과 1백5인으로 각각 기록해 놓았다. ‘두문동 72현’이라는 용어의 ‘72현’은 공자의 제자를 지칭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의 제자는 3,000명이었는데 몸소 육례(六藝)에 통달한 제자는 72인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72’라는 숫자는 구체적인 사람의 수를 지칭하기보다는 ‘다수의 현인(賢人)’을 지칭하는 말로 이해해야 하겠다.
<두문동 72현 관련 기록연보>
1751년 두문동비
1760년 부조현비
1774년 철감록
1783년 개성 성균관에 표절사
1809년 두문동실기 간행
1860년 화해사전
1872년 기우집
1923년 여조충렬록 간행
1924년 전고대방 간행
1934년 두문동서원지
1934년 개성에 두문동서원 창건
1935년 경현사지 간행 등이 이루어졌다.
□ 두문동 서원과 72현
  두문동서원은 경기도 개성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에 위치하며 고려말 충신들이 새 왕조에 불복하고 두문동에 들어와서 마을의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 빗장을 걸어 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두문동 72현이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 정조 7년에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를 세워 배향하게 했다. 1934년 개성에 세운 두문동서원은 임선미(林先味)의 후손 임하영(林河永)이 주동이 되어 창건하였는데 고려말 불사이군 대의를 위하여 순절한 72현 및 정몽주, 이색 등 절의를 지킨 고려말충신 119위를 모신 서원이다.
 
□ 두문동 72현 명단(諱)
1) 두문동 표절실 순절반 봉안 (杜門洞 表節室 殉節班 奉安) : 17분
2) 두문동 표절실 항절반 봉안 (杜門洞 表節室 抗節班 奉安) : 31분
3) 두문동 표절실 정절반 봉안 (杜門洞 表節室 靖節伴 奉安) : 7분
4) 두문동 순절실 순절반 봉안 (杜門洞 殉節室 殉節班 奉安) : 11분
5) 두문동 항절실 항절반 봉안 (杜門洞 抗節室 抗節班 奉安) : 33분
    퇴휴당(退休堂) 선윤지(宣允祉) 보성인(寶城人)
7) 서원에 봉안안된 두문동 절신 :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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