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명 칭 : 보성 오충사 유허비(寶城 五忠祠 遺墟碑)
2. 소 재 지 :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보성리 751-3번지
3. 소 유 자 : (사)사액오충사유지보존회이사장 선상규(전남 보성군 보성읍 751-3)
4. 대상물 개요
ㅇ 수량 : 석비 1기
ㅇ 조성시기 : 1909년(1960년 현 위치로 옮김)
ㅇ 규모 : 비신높이 249cm, 너비 81cm, 두께 33cm, 총 높이 327cm
5. 입지와 연혁
ㅇ 보성 오충사유허비는 사액 사우인 오충사(五忠祠, 1739년 건립, 1831년 사액)가 조선시대 말기 훼철령으로 헐린 뒤 1909년에 세워졌다.
ㅇ 조선시대 말기 성리학자로 유명한 송사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비문을 지었다. 비문의 내용은 선윤지, 선형, 선거이, 선약해, 선세강 등 국가에 공훈을 세운 인물들의 행적, 증직, 사제문, 그리고 오충사의 유래와 명(銘)으로 엮었다.
비문은 1909년 3월에 후손 선영기(永琦), 선영숙(永淑), 선영기(永祺) 등이 비문을 청하여 짓게 되었고, 5월 26일에 비를 세웠다. 당시 석재는 보성지역에서 구하여 새긴 뒤 옮겨 온 것으로 전하고 있다. 비문 끝에 사액연도를 표기하고 선종한이 합력했음도 표기되어 있다. 비 건립에 참여한 사람은 유사(有司) 선영우(永禹), 선창식(昌植), 장재(掌財) 기성(基成), 영오(永午), 정서(正書), 병훈(炳勛), 정근(正根)이다.
6. 문화재 현황
ㅇ 이 비(碑)가 건립되어 있는 보성선씨오충사(寶城宣氏五忠祠)는 1739년에 설립된 이래 1831년 사액(賜額) 사우(祠宇)가 되었으며, 조선말 사원철폐령에 따라 철폐(撤廢)되었다.
ㅇ 이 비(碑)의 제액(題額)은 보성선씨오충사유허비(寶城宣氏五忠祠遺墟碑)이며 1909년에 건립되어 보성군 보성읍 신흥동 소재 보성선씨종약소(寶城宣氏宗約所)에 위치하고 있다가, 1960년에 보성군 보성읍 보성리 751-3번지 소재 보성선씨오충사(寶城宣氏五忠祠)로 이치(移置)되어 현재에 이르 고 있다.
ㅇ 이 비문은 조선조 말기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지은 것이다.
ㅇ 비신(碑身) 전면에 보성선씨오충사유허비(寶城宣氏五忠祠遺墟碑)라는 제액(題額)이새겨져 있고, 좌측면 상단부부터 비문(碑文)이 시작되어 뒷면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측면에 비문이 끝난다. 비신은 암회색의 자연석으로 보통 비석의 너비와 폭에 비해 높이가 매우 높은 편이다.
개석(蓋石)은 한옥의 지붕모양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재질이 사력암으로 비신과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대좌(臺座)는 단순한 방형(方形)으로 중간에 홈을 파고 비신을 끼워 세웠다. 대좌의 재질도 비신, 개석과 상이하다.
ㅇ 서체(書體)에 있어 제액(題額)은 행서체(行書體)가 약간 가미된 해서체(楷書體), 비
ㅇ 비문에는 보성선씨의 시조인 퇴휴당(退休堂) 선윤지(宣允祉)를 비롯한 선형(宣炯),선거이(宣居怡}), 선세강(宣世綱), 선약해(宣若海) 등 보성선씨 선대 5충신의 공적을 기린 내용이 새겨져 있다.
선윤지(생몰년 미상)는 明나라에서 고려로 귀화한 인물로 호남관찰사가 되어 왜구를 소탕하여 민생을 평안케 하였으며, 유교의 도리로 풍속을 교화하여 세상을 바르게 한 공로가 있다. 선형(1434-1476)은 1467년(세조 13) 길주에서 봉기한 이시애의 난 때에 황해도관찰사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에 훈록되어 유성군(楡城君)에 책봉되었다. 사후에는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선거이(1550-1598)는 무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북진하여 행주, 운봉(雲峰), 곤양(昆陽) 등지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경주(慶州)전투에서 순국하였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세강(1577-1637)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안동영장(安東營將)으로 적군을 끝까지 방어하다가 적탄에 의연하게 순절한 인물이다.
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약해(1579-1643)는 인조 때에 주사랑으로 국서(國書)를 가지고 심양(瀋陽)에 들어가 明의 연호를 버릴 수 없고, 조선이 병마를 바칠 수 없음을 역설한 인물로 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선약해의 공적내용은 본 유허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문화재등록신청서에 첨부된 비문 국역 중 선약해 관련 내용은 아마도 다른 史料에서 인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ㅇ 보성선씨오충사유허비(寶城宣氏五忠祠遺墟碑) 원문 및 역문
寶城宣氏五忠祠遺墟碑
祠以享五忠 皆宣氏先烈 主享退休堂諱允祉下 四忠 幷其肖孫 以次配食 退休先生天性 忠孝 在 上國에 名位淸揚 以文淵』
閣學{士 奉 命東來 卽授湖南觀察使 于時 島夷 內訌 陸海轉戰 燒蕩巢穴 民國 賴安 闢邪衛正擔奔爲己任毁破佛像倡明』
聖學{勸行三年喪 扶}直彛倫 見麗運訖 退居于寶城郡內 因籍焉 賜祭文 有曰學{士東來 皇華播詠 不陋居夷 籍我南屛 通』
喪化俗 闢佛扶}正 忠孝垂訓 世篤餘慶 盖其實褒而 贈吏曹判書 楡城君諱炯 以海西伯 討李施{愛於吉州 一月三捷 大亂』
以平 策精忠敵愾勳 又錄佐理功 行佐右贊成 封君 贈謚 謚 平襄 紀功勳府{ 繪像凌烟 賜祭文 有曰有偉楡城 文武名』
卿 敵愾討畔 佐理致平 歷躡崇班 再參 勳盟 壽考令終 視彼易名 亦其實褒而 贈右議政 副師諱 居怡} 龍蛇之年 以湖南兵』
馬使 領兵北上 所向無前 禿城幸州金嶺雲峯閑山昆陽 上下連捷而杯山之碑가 屹然可徵 南至慶州 中飛丸 裏瘡督戰 斬獲』
無弄 因以立慬 李忠武柳西崖 有錄可詳 賜祭文 有曰龍蛇之亂 曰有禦侮 投예南閫奏捷三路 身殉}飛駁 名留大樹 若比』
其烈 惟李忠武 第李忠武 爲時元勳而 天褒以將 又何加焉 贈兵曹判書水使諱若海以籌司 散郞 得薦寄命 則其雄』
鞱氣畧爲百司推服者可槪而齎國書入瀋陽明言上國年號之不可去我國兵馬之不可借義秉\春秋 罵舌 愈勁竟』
不辱君命而還 寵褒優賞 倭以閫任副以金鞭玉杯貂裘以榮之 賜癸文 有曰乾坤 翻覆孰知尊王 惟一籌郞 抗義』
殊方 片言折服 萬古綱常 便審之錫 寰褒煌煌 嗚呼 萬古綱常之褒 天日 可以動色吁其盛矣 贈兵曹判書 贈參判諱世』
綱 丙子虜變 以安東營將 禦賊於雙嶺 摲殺將盡 乘勝前驅 艱虞可濟而賊刃 忽及步武不移 毅然取態 賜祭文 有曰是叔』
是姪 慷慨忠勇 孤城髮危 壯士氣湧 北首蹈刃 戰不旋踵 特肔亞卿 恩誥鄭重 盖鄭重恩誥 百世煌煌 豈後人煩舌設所』
可增損 再贈兵曹判書 凡有功於民國 可祭 於社則士 林之俎豆 朝家之宣額 繼以旌贈 公私哀塋 不一而足而大同撤院』
祠撤而墟 第念院宇興廢 實關時運之盛衰 奧 昔忠賢畢祀 家國以寧 秩祠以停 艱虞 溢目 此理勢之必至也 水不忍廢 地不』
忍荒 遺墟以識 使後人 知五忠之樹立卓然 高景而慕傚之則殆 所謂亂極思治君子得輿者歟竊不勝喜悅之私 宣氏之徵』
爲銘 不可以病廢而辭 宣氏永琦永淑永祺 樂欽後先 踵門 屬余以銘 銘曰』
退休道儀 平襄勳烈 元帥授命 忠凜霜雪 瀋陽持節 義服胡鞨 雙嶺立慬 精特柄日月一門五忠 千秋芬苾 享祀有祝 淵泉之筆』
無以加諸 昭揭于石』
歲己酉春三月初吉幸州奇宇萬撰
純廟辛卯賜額 後孫宗漢盡誠蒙 允
聖上三年己酉五月二十六日建碑
有司 永禹 昌植
掌財 基成 永午
正書 炳勛 正根
[비문 역문]
오충사는 선씨 선열 퇴휴당 휘 윤지(允祉)를 주벽으로 후손 4충신을 함께 향사한 사당이다. 퇴휴당은 명나라에서 충효정신이 뛰어나고 명성과 지위가 특별하시어 문연각 학사로 고려(우왕 9년, 서기 1382년)에 사신의 명을 받고 와서 호남관찰사가 되시니 이 때에 왜구가 백성을 괴롭히거늘 육해 사방으로 무찌르고 소굴을소탕하니 민국이 편안케 되고 사악을 물리치고 성학을 밝혀 부모 삼년상을 실행케하고 삼강오륜을 부식(扶}植)게 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보성군에 퇴거하여 보성으로 본적을 삼으셨다. 제문에 선학사가 조선에 와서 중화를 높이고 조선을 위대하게 하였다. 사후의 풍속을 교화하고 충효의 수훈으로 세상을 바르게 했다. 이 사실을 포양하여 이조판서에 증직되시다.
유성군 휘 형은 해서백으로 이시애난을 대승리로 평정하여 정충적개훈에 책봉되고 다시 좌리공신에 오르고 좌․우찬성을 행직하고 봉군 증시되시니 시호는 평양이라. 공훈부에 기록되며 기린각에 영정을 모셨으며 제문에 위대한 유성군이여 문무가 훌륭한 제상이라 적개토반 하고 좌리치평이라 높은 지위에 오르고 다시 공훈에 더하여 오랫동안 이름이 전한다는 사실을 포양하여 우의정에 증직되시다.
부원수 공의 휘는 거이니 임란에 호남 병마사로 북진 승전이라 독성, 행주, 금영, 운봉, 화산, 곤양 등의 대첩은 배산(행주산성)에 서있는 비석으로도 증명할 만하다. 경주에 이르러 실탄을 맞고 창병과 같으나 전투를 독려하여 무수한 적을 무찌르는 용맹을 충무공(이순신)과 서애(류성룡)의 기록에 잘 알 수 있다.
제문에 임진왜란에 어모의 무신이 있어 남방이 안녕하고 세 차례나 대첩이 있음을 나라에 보고 하였다. 날아온 실탄에 순직하여 이름을 크게 세웠으니 이 열행을 비교하면 이 충무공과 같다. 생각건대 충무란 당시의 원훈으로 하늘이 포양함이나 또 다른 무슨 말을 하리오. 병조판서에 증직되시다.
증 참판 휘 세강은 병자호란에 안동 영장으로 쌍영에서 적을 방어할 때 거의 무찌르고 승승장구하여 어려움이 거의 끝날 때 적탄을 갑자기 맞았음에도 한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의연하게 취하였다. 제문에 이 아저씨에 이 조카의 강개한 충용이라 외로운 성 일촉즉발의 위험에도 장수의 기백은 용솟음치어라. 임금을 위하여 전투 중에도 발길을 옮기지 않았으므로 특히 아경하사 은고가 이렇게 정중하니 백년토록 빛날지라. 어찌 후인이 한치의 혀로 무슨 말을 하리요. 다시 병조판서로 증직되시다.
수사공 휘 약해는 주사랑으로 육도삼략의 기략과 추복자로 천거되어 국서를 갖고 심양에서 상국연호의 당연성과 조선국 병마를 바칠 수 없는 점과 역사의 당연성에 청나라를 꾸짖는 말이 목을 치는 것보다 더 무섭게 국위선양에 욕됨이 없이 귀국하여 임금의 포양과 총애를 받고 또한 부상으로 옥배 금편 초구의 영광을 하사 받았다. 제문에 천지의 번복에 그 누가 존왕할 줄 알았단 말인가? 오직 일주랑이 정의로 항거한 방법이라 일편단심의 충언으로 청국을 굴복시키니 만고의 강상이요 임금의 포양은 빛나고 훌륭하다. 오호라 만고강상의 포양은 하늘의 동함도 성스러웠으리라. 병조판서에 증직되시다.
무릇 민국에서 유공하여 제사할 수 있음에도 대동철원의 시칙으로 터만 남아있으니 생각건대 원사의 흥패는로 시운의 성쇠에 관련이라 옛날 충현을 제사 드림에 가국이 안녕하고 제사를 못 드릴 때 근심이 많음은 이 이치의 지당함이라. 산수와 지형 아름다움을 폐할 수 없어 유허비에 기록하여 후인으로 오충의 경모정신을 본받은 즉 아마 난을 충으로 다스릴 수 있고 군자도 이런 일에 함께 참여할 수 있으리라.
조용히 생각건대 나로서는 기쁨이 더 없을 진데 선씨의 훌륭한 명성을 증거코자 하였으나 몸의 불편으로 사양하다가 선씨의 영기, 영숙, 영화가 내 집을 찾아 와 명을 부탁하므로 명왈 퇴휴당의 도의와 평양공의 훈열로 원수의 왕명을 받아 국가를 위한 충절은 상설보다 차가웁고 쌍영의 용기는 일월보다 밝구나. 심양땅에 서 굳은 절개로 오랑캐를 굴복시키고 선씨 한 문중의 오충이 천년의 향기 피워지리라. 향사의 축문은 연천 김이양 선생이 썼다. 비석에 이보다 더 무엇을 게시하여 밝힐 수 없노라.
7. 조사자 의견
< 문화재위원 ○○○(조선대 교수, 건축사) >
ㅇ 오충사는 국가에 공훈을 세운 보성 선씨 퇴휴당 선윤지를 비롯한 다섯분을 모신 사우이다. 최초의 건립은 1739년(영조 15)에 옥산사로 건립되어 1831년(순조 31) 오충사로 사액사우가 되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조치에 따라 훼철되었다.
ㅇ 유허비는 1909년 송사 기우만(독립운동가, 1846~1916)에게 청하여 비문이 지어지고 후손에 의해 세워졌다.
ㅇ 이 비문의 내용은 사액서원 오충사의 연혁과 국가에 공훈한 보성 선씨 다섯분의 행적과 증직 사제문, 오충사의 유래와 명으로 되어 있다. 석비는 해서체로 기록되었으며 형태 또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사적비 형태이다.
석재의 산지는 이 지역 미력면 대룡산 소룡동이며 당시대의 금석문 건립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건립연대(1909)로 보아 이 비문의 내용에는 국가가 처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조선왕조의 전통을 계승한 구국 충정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ㅇ 상기의 내용으로 보아 비문은 송사 기우만의 글로서 사료적 가치가 있으며, 보성선씨 선조의 충절을 통해 향촌사회의 충의정신을 고취시켰고, 대한제국의 어려운국가적 상황에서도 구국 충정의 역사성을 계승한 정신적 의지가 기록된 점, 당시대의 금석문 건립과정에 대한 자료적 의의가 있다는 점에서 이 유허비는 등록문화재로서 그 가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 문화재전문위원 ○○○(한국외국어대 겸임교수, 한국사) >
ㅇ 보성 선씨 오충사 유허비는 사액 사우인 오충사(五忠祠)가 조선시대 말기 훼철령으로 헐린 뒤 1909년에 세웠다. 조선시대 말기 성리학자 송사 기우만(奇宇萬,1846∼1916)이 비문을 지었다. 비문의 내용은 선윤지, 선형, 선거이, 선약해, 선세강 등 국가에 공훈을 세운 인물들의 행적, 증직, 사제문, 그리고 오충사의 유래와 명(銘)으로 엮었다.
ㅇ 보성 선씨 오충사 유허비는 원래 보성 선씨들의 종약소(宗約所)가 있던 보성읍 신흥동 현재의 농협군지부 자리 부근이었다고 한다. 뒤에 충의당 옆에 매안(埋安)하였다가 1960년 오충사 복설시에 현재의 자리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ㅇ 그동안의 등록문화재는 대부분 한국의 근대문화 형성 및 전개와 관련된 문화재이나 보성 선씨 오충사 유허비는 전 근대사회 문화재의 전형적인 형태이므로 보성선씨 오충사 유허비를 근대문화재 등록하는 것은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 문화재전문위원 ○○○(서지학) >
ㅇ 본 보성선씨오충사유허비(寶城宣氏五忠祠遺墟碑)는 우선 비신(碑身)이 보통의 비석(碑石)과는 달리 높이가 장대(長大)하고 글씨가 해정(楷正)하게 새겨져 있어서 외형적으로는 늠름하게 보인다. 비문의 내용은 보성선씨(寶城宣氏) 선대(先代)의 오충신(五忠臣)의 공적을 기린 내용이다. 국가가 내우외환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선조들이 목숨을 아끼지않는 충절의 정신으로 나라를 위해 싸운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후세에 애국‧애족의 정신을 고취시키는 교육적인 사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본다.
ㅇ 다만, 일개 가문 선조들의 공적을 새긴 비(碑)로 건립연대가 너무 근대의 것이라서 희소성의 가치가 적고, 비신(碑身)에하여 개석(蓋石)과 대좌(臺座)의 품이 비교적 떨어지는 편이며 조화미도 없어 보인다. 또한 비문에 오충신(五忠臣)의 공적 중 한사람의 공적내용이 새겨져 있지 않아서 제액(題額)과 부합하지 않은 일면도 있다.
ㅇ 따라서, 본 보성선씨오충사유허비를 국가문화재로 등록하기에는 다소간 미흡하다고 판단되며, 지방유형문화재 또는 향토자료로 지정하여 계속 보존하고 활용하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사료된다.
● 본자료는 2010년 문화재청에 요청한 보성오충사 유허비에 대한 문화재 등록여부 검토에 관한 조사보고서입니다. 검토결과 국가문화재등록은 부결하나 지방문화재 또는 향토자료로 관리하는 것이 타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