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고집 [ 楓皐集 ]
조선 후기의 문신 김조순(金祖淳)의 시문집.
16권 8책. 고활자본. 1868년(고종 5) 그의 문중에서 간행하였다. 『풍고집』 권두에는 고종의 친필 어제(御製) 서문과 총목이 있다. 권말에는 정원용(鄭元容)·김흥근(金興根)·조두순(趙斗淳) 등의 발문이 있다.
내용은 권1∼6에 1,032수의 시, 권7·8은 소차(疏箚) 60편, 권9는 주(奏) 3편, 계(啓) 2편, 응제문(應製文) 14편, 제문 20편, 권10은 서(書) 36편, 권11은 비명 5편, 묘갈 10편, 권12는 묘지 7편, 묘표 4편, 행장 3편, 권13·14는 시장(諡狀) 12편, 권15는 서(序) 10편, 기(記) 8편, 발(跋) 7편, 잠(箴) 1편, 명(銘) 5편, 송(頌) 2편, 찬(贊) 1편, 전(傳) 4편, 권16은 잡저 2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풍고집』 중에 문집의 3분의 1을 시가 차지하고 있다. 이 것으로 미루어 보면 김조순이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핵심인물이면서도 문학·예술 방면에 대한 남다른 취향과 소질을 나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학교류에 있어서 그는 비교적 당파나 신분 차이에 구속받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36편의 왕복서신은 주로 당시 요직에 있던 벌열계층(閥閱階層)들과 이루어지고 있다. 당시에 세도정권 내부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에 자료가 된다.
『풍고집』의 「서얼소통수의(庶孽疏通收議)」는 1779년 (정조 3) 영향력 있는 대신으로서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조정에 건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것은 서얼출신들이 지속적으로 벌여 온 집단적인 상소운동에 대한 정부의 개선책이 요구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풍고집』 권16의 잡저 중에서 서화고동(書畫古董)에 관한 김조순의 남다른 감식안을 알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예술취향은 조선 후기인 18세기에 중국을 내왕하던 지식층간에 주요관심사항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楓皐集卷之十六 書宣氏三綱錄後
<원 문>
宣氏自得姓。世居寶城。上世多聞人。雖中微於今猶 湖南之名族也。余客曰。宗漢。字武賢。愿而確。工醫而有榦。從余遊旣久。一日手其先世忠孝行蹟一冊。示余。且曰。某之淹京師十年。非干祿也。非求名也。欲以闡先祖之德也。歷觀當世之大人君子。莫如公盛。其知我而愛我。亦莫如公深。願得公一語。賁諸卷。公言之不朽。卽先祖之不朽也。敢以請。余受而卒業。復於生曰。近日鄕人之丐人文字。揚扢其先德者。指不勝僂。然刊布未竟。譏笑四起者何歟。豈非紀實之未足徵。而揚扢者有求於世乎。今君之此編。其忠孝之實。炳炳硠硠。塗人耳目。公私之所徵信。而君之心又純而無他。余又何憚乎載筆。雖然。君之先德。旣炳炳硠硠。塗人耳目。復何待余言而徵信。余亦何所加哉。余惟有勉乎君者耳。詩云。民之秉彝。好是懿德。忠孝者。秉彝之所由生也。人而無彝性則已。有彝性者。孰不有忠孝乎。然世之罕忠臣孝子者。特不知吾性之所有而擴充之耳。君之先世諸公。能擴充其性。故其炳炳硠硠者。可百世而不泯。今君汲汲然爲先之誠。雖固可敬。猶未若汲汲然擴充君忠孝之性。以繩其先美之爲尤美也。傳曰。立身揚名。以顯父母。夫所謂立也揚也。豈仕宦顯達之謂也。忠孝而已矣。闡先孰大。於是君其勉乎哉。壬午閏三月旣望。楓皐居士。書。
<宣氏 三綱錄 후서를 쓰며>
선씨가 姓을 얻고부터 보성에 대대로 거주한 것은 세상에서 들은 사람이 많다. 비록 중간에 쇠퇴하였으나 지금에는 오히려 호남의 이름난 집안이다. 나에게 와서 묵고 있는 宗漢이라는 사람은 字가 武賢이다. 질박하고 굳세며 의술을 공부하였고 주간하는 능력이 있으며 나에게 글을 배운지 벌써 오래되었다. 하루는 선대의 충효행적을 적은 책 하나를 가지고 나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저는 서울에 십년이나 머물렀지만 봉급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며, 명예를 구하려고 해서도 아니며, 선조의 덕을 드러내고 싶어서입니다. 당세에 대인군자들을 차례로 살펴보니 공만큼 훌륭한 이가 없으며, 저를 알고 저를 아끼는 사람도 공만큼 깊은 사람이 없습니다. 원컨대 공께서 한마디 글을 적어 책을 빛내어 주십시오. 공의 말씀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 바로 선조의 행적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감히 요청합니다.”
하였다.
내가 책을 받아들고 다 보고는 다시 종한에게 말하기를,
“근래에 시골사람 중 남의 글을 빌려서 선조의 덕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손가락을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네. 그러나 간행하여 다 나누어주기도 전에 사방사람들이 비웃는 것은 왜이겠는가? 지금 그대가 준 이 책에 적힌 충효의 사실은 길가는 사람의 이목에 환하고 낭랑하며 공사간에 믿을 만한 바이네. 그대의 마음이 순수하고 다른 뜻이 없으니 내가 글을 짓는 것을 무얼 그리 꺼리겠는가? 비록 그러나 그대의 선조의 덕업이 이미 길가는 사람들의 이목에 환하고 낭랑한데, 다시 내가 글을 지어 증거삼을 필요가 무어 있겠는가? 나 역시 무슨 말을 더 보태겠는가? 나는 오직 그대에게 권면하고 싶을 뿐이네. 시경에 말하기를,
“사람들이 떳떳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하였네. 충효라는 것은 떳떳한 본성이 나오는 곳이네. 사람으로서 떳떳한 본성이 없으면 몰라도 떳떳한 성품이 있다면 누군들 충효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세상에서 충신과 효자가 드문 것은 아마도 내가 소유하고 있는 본성을 확충할 줄 모르기 때문이네. 그대의 선대 여러 공들은 능히 그 성품을 확충하였으므로 백세가 흐르도록 사라지지 않을 만하네. 지금 그대가 선조를 위하는 분주한 정성은 비록 참으로 공경할 만하지만, 오히려 그대의 충효의 성품을 분주히 확충하여 선대의 훌륭함을 잇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네. 전(傳)에, “입신양명하여 부모의 이름을 드러낸다.” 하였는데, 이른바 입신(立身)이라는 것과 양명(揚名)이라는 것은 어찌 벼슬하여 현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바로 충효를 말하는 것일 뿐이네. 선조를 드러내는 것이 이보다 더 훌륭한 방법이 있겠는가? 이러하니 그대는 힘을 쓰시게나.“
하였다.
임오(1822년)년 윤삼월 15일에 풍고거사 씀.
□ 선생(宣生) 종한(宗漢)이 남쪽으로 돌아감을 송별하다. (送宣生宗漢南歸)
楓皐集卷之五 詩 送宣生宗漢南歸
北風捲征袂 /북풍에 군인의 옷소매 너울대는데
羸馬念君歸 /야윈 말 타고 그대 돌아감을 생각한다네.
千里雪如許 /천리에는 눈이 이처럼 쌓였는데
再來春庶幾 /언제 다시 봄 오려는가!
孝心忘客苦 /효심은 객의 고뇌를 잊게 하는데
恩額耀先徽 /임금이 내린 사액 선조의 아름다움 빛낸다네.
此別堪歎息 /이 이별의 탄식 어찌 견디나!
殘年共古稀 /남은 해 함께 고희(古稀) 맞아야지.
1) 풍고(楓皐)김조순(金祖淳, 1765년~1832년)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가이다. 본관은 (신)안동(安東)이며, 자(字)는 사원(士源), 호(號)는 풍고(楓皐),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영의정을 지낸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현손이며 서흥부사(瑞興府使) 김이중(金履中)의 아들이다. 노론이었으나 시파에 속하였으며, 정조의 신임이 바탕이 되어 딸인 순원왕후가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면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저서로 《풍고집(楓皐集)》이 있고, 설화소설 《오대검협전(五臺劒俠傳)》이 있으며 시호는 충문(忠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