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죽천집(竹川集)
저자 : 박광전(朴光前)
이황의 학풍을 이은 대표적인 학자이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보성의 임계영, 장흥의 문위세, 능성의 김익복 등과 함께 ‘전라좌의병’을 일으키고 전주에 있던 광해군에게 전란 극복을 위한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593년 익위사 익위에 임명되었으며 1597년 다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다 죽었다. 문인으로는 안방준(安邦俊)과 선인후(宣仁厚)․ 선정달(宣廷達)․ 안중묵(安重黙)․ 권극제(權克悌)․ 정길(鄭佶)․ 김성장(金成章)․ 이윤남(李允男)․ 박광선(朴光先)․ 정사제(鄭思悌) 등이 있다.
조선 중기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 1526~1597)의 문집이다. 시문은 문인인 선정달(宣廷達)이 수집하여 보관하고 있었는데 주자서(朱子書)에 대한 질의(質疑) 1책만 따로 간행되었을 뿐 오랫동안 산정도 거치지 못한 초고 상태로 있었던 듯하다. 연보에 의하면 1739년 ‘문집성(文集成)’이라고 하여 이 시기에 저자의 후손 박봉석(朴鳳錫) 등이 편차해 성서(成書)해서 윤봉조(尹鳳朝)에게 서문을 받아 간행을 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1754년 봄에 5대손 박내석(朴乃錫) 등이 불분권 1책으로 간행하였지만 전하지 않는다. 1809년에 후손 박재환(朴在煥), 박형덕(朴馨德) 등이 이후에 수집한 시문을 증보하고 범례와 연보 등의 내용을 수정하여 송치규(宋穉圭)의 고열(考閱)을 거쳐 용산서원(龍山書院)에서 4권 2책으로 중간하였다. 본집은 9권 4책으로, 권1~5는 저자의 시문이고 권6~9는 부록문자로 이루어져 있다. 사제문은 1610년에 저자를 좌승지에 추증할 때에 내린 제문과 1707년에 용산서원을 사액할 때에 내린 제문이다. 마지막에는 1930년에 죽곡정사(竹谷精舍)에서 간행한다는 인권지(印權紙)가 실려 있다.
三十七年戊午 先生三十三歲
門人宣廷達。欲學楚辭。先生書五言絶句於冊衣。詩見文集
竹川先生文集卷之一
詩
題宣廷達楚辭冊
欲學屈子辭。先尋屈子意。君看不病人。那得呻吟似
竹川先生文集卷之七
附錄
遺事
先生功而穎悟。性復端醇。遊戲動作。不習而暗合規束。自始有知。卽取性理大全。日加功於斯。鄕隣皆以爲神童。先生平居循循。無大異於衆。而及臨利害決大義。確肰不可奪。雖於遊戲之際。必以其正而不容其私。以至翰墨詞章。殊絶於時輩。而荒誕浮華之說。不出於口。且以誠心厚意接物。故人無賢不肖。皆不厭焉。奉進士公。正衣冠。終日侍側。未嘗少違膝下。以營外事。蓋至誠愛親。天性自肰。非出矯揉。故鄕隣莫不歎服。歲庚午。大小儒生。交章連狀。共薦于監司。監司素聞其名。卽薦于朝。除慶基殿參奉。後又除獻陵參奉。及爲王子師傅。輔翼實多。歷咸悅,懷德二縣。治績昭著。退歸田廬。安靜自守。不復榮進。溪山樵採。怡肰自樂。先生置散之餘。値壬辰之亂。與任公啓英,金公益福,文公緯世。奮起倡義。募得精兵七百餘人。而先生病不能行。推任公爲左義將。命長子根孝參謀幕府。捍蔽要害。皆有功績。及大駕還都之日。以病不能勤王之意。上疏自陳。特除翊衛。以老病乞歸。又値丁酉之亂。生員朴士吉諸人曰。先生長者取信於人久矣。願爲義將。以應衆心。先生曰。余雖老且病。一息尙存。死於王事。可也。遂與約束。募兵募糧。以前判官宋弘烈爲副將。入同福地。衝破賊穴。軍聲稍振。守宰之投竄者。忌其成功。反沮撓之。未幾。先生竟以疾不起。嗚呼。先生之學。不求諸外。而本於孝悌。行之以謹愼恭遜。其見於容。則一團和氣耳。尤遽於性理之學。有所自得。而人莫能窺其際。是故。發於詩思文章者。有典重溫雅之致。金河西先生見先生歌詠。恨其相知之晩。趙校理希文覽先生詞賦。願見其面。先生丙寅冬。趨拜退溪門下。及還。退溪深加歎賞曰。晩逢好友。遽爾相別。烏得無言。書七言絶句五首。勉以雲谷爲入道之程。而以朱書節要一帙贈之。乃退溪平日所嘗點考句讀。且書質疑處者也。先生敬受服膺。以爲終身事業。戊辰。先生中進士。居泮宮時。華使謁聖。仍坐明倫堂。諸生禮謁。而先生亦在排班中。不意兩下。諸生奔走。趨避東西齋簷下。先生遍諭前後一二行以無得潰散之意。故一二行獨堅立不動。諸潰散者。稍稍還集。及退。一二行乃從容隨行而罷。是時。退溪先生以哭臨赴闕。亦參見其狀。謂先生曰。方其一二行不散之時。其力重矣云。進士公有不安節。則憂形於色。寢不解帶。奔走湯藥。病已復初。數十年間。色養兼至。及其丁憂。過哀成疾。難於目保。而猶以禮從事。喪祭一遵家禮。是時。先生年幾六十。氣貌甚衰。執喪愈敬。而無蜣闋服。人皆以爲孝感所致。而亦云先生平生。以循欲忘身。爲深恥之驗也。先生少時。與諸友會于大原寺讀書。余亦從焉。一日因流憩。見兩溪合流于叢薄之間。而水淸石奇。去寺門百步許。可爲遊觀之所。而人莫能知者。於是。刪翳薈。築石壇。名之曰遇溪。仍刻遇溪二大字於巖石。南張甫所書。而記則先生所作也。梁松川見其記。賞歎曰。人莫能及者也。先生生于兆陽。晩遷龍門。最後移瓊谷龍門。乃與余同里而至近之地也。一鄕文風之興。自先生始焉。兆陽南臨滄海。西對五峯。山海之雄。擅勝於南中。而播於訥齋之歌詠矣。降神聚福。以生先生。故秀麗峻拔之氣。混涵停滀之量。詎無應之而肰歟。惜乎。才不爲世用。位不滿其德。不能無遺恨於後世也。先生嘗以海嶠爲號者。蓋取始生之地所見山海而云耳。瓊谷。乃晩遷地名。亦因以爲號。竹川。乃先生所居北一里許大川也。先生於物無所好。而惟以菊梅爲庭實。蓋因進士公之所嘗好。而不改其樂也。先生謙恭自虛。一向爲己。不求人知。故平居。雖誨人不倦。而亦不聚生徒。先生長子根孝甫。能繼先業。早登司馬。官除長水縣監。不幸早世。次子根悌甫。除參奉不就。有志於學。而遭亂不能專業。竊恐先生行狀遺稿。無人撰集。而流落人間者。不得收拾於兵火之後也。余於先生。族疏而情密。義重而恩深。情當一往奠蒭。收集遺文。俾無失墜。而干戈阻絶。星霜荏苒。死日已迫。玆用略述其平昔死嘗聞見行蹟。以寄吾永慕之思焉。且與湖南撰先生之行狀者。俾無遺失之迹於後日云。遂爲之贊曰。相不加追。章不以琢。非水而澄。非山而嶷。年月日。門人生員 宣廷達。謹書
2-2 과거 및 취재 기록 선정달(宣廷達) , 선응직(宣應直)
선정달(宣廷達)
[생원시] 명종(明宗) 19년(156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36위(66/100)
[인물요약]
자 행가(行可) / 생년 정유(丁酉) 1537년(중종 32)
합격연령 28세 / 본관 보성(寶城) / 거주지 보성(寶城)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 전력 유학(幼學) / 부모구존 자시하(慈侍下)
[가족사항]
[부]
성명 : 선응신(宣應臣) / 관직 : 학생(學生)
[안항:형] / 성명 : 선정원(宣廷遠)
[안항:제] / 성명 : 선정도(宣廷道)
[출전] 가정43년갑자7월20일사마방목(嘉靖四十三年甲子七月二十日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
선응직(宣應直)
[진사시] 선조(宣祖) 3년(157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5위(35/100)
[인물요약]
자 계온(季溫) / 생년 무자(戊子) 1528년(중종 23) / 합격연령 43세
본관 보성(寶城) / 거주지 보성(寶城)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 전력 유학(幼學) / 부모구존 영감하(永感下)
[가족사항]
[부]
성명 : 선병(宣秉) / 관직 :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
[안항:형]
성명 : 선응신(宣應臣) / 선응량(宣應良) / 선응충(宣應忠)
[출전]
『융경4년경오2월18일사마방목(隆慶四年庚午二月十八日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
2-3 포저집 (浦渚集) 선정달(宣廷達)
조 익 (趙翼) 1579∼1655 (선조 12∼효종 6) 字: 飛卿, 號: 浦渚․存齋, 本貫: 豐壤, 父: 瑩中, 母: 海平 尹氏
조 익 (趙翼) : 조선(朝鮮) 시대(時代) 17대 효종(孝宗) 때의 문신(文臣)ㆍ학자(學者). 자는 비경(飛卿). 호는 포저(浦渚). 본은 풍양(豊壤). 14대 선조(宣祖) 35(1602)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직제학ㆍ대사헌(大司憲)을 거쳐 효종(孝宗) 초년에 좌의정(左議政)에 이름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 대동법(大同法)의 시행(施行)을 적극 주장(主張)했으며, 문장(文章)에 뛰어났음. 시호(諡號)는 문효(文孝). 저서(著書) 『포저집(浦渚集)』 『서경천설(書經淺說)』 이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의하면 조익 또는 조상국으로 칭하기도 한다.
浦渚先生集卷之二十九
祭文 三十首
祭宣生員 廷達 文 85집522상
선 생원(宣生員) 정달(廷達) 에 대한 제문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선생은 / 謹惟先生
남방 출신의 걸출한 인물로서 / 南國之特
퇴도의 덕을 본받고 사모하며 / 私淑退陶
멀리 염락을 목표로 삼아 / 遠慕濂洛
손으로 베끼고 입으로 외우며 / 手抄口誦
늙어서도 더욱 돈독히 하였어라 / 老而彌篤
사람이 없고 도가 무너져서 / 人亡道喪
습속이 날로 야박해진 탓으로 / 世習日薄
오직 이익만을 찾게 되었으니 / 唯利是視
누가 옛 학문에 뜻을 두겠는가 / 孰志古學
아 우리 선생과 같은 분을 / 嗟我先生
어떻게 다시 쉽게 얻으리오 / 寧復易得
지난 정유년에 / 在歲丁酉
섬 오랑캐가 멋대로 날뛰자 / 島夷陸梁
난을 피하여 북쪽으로 와서 / 避寇北來
마침내 온양 땅에 거주하였는데 / 遂家溫陽
거주함에 무슨 누추함이 있으리오 / 居之何陋
덕으로 훈도하여 선량하게 하였도다 / 薰德善良
고대의 서적에 마음을 노닐고 / 心游墳典
고대 성왕(聖王)의 도를 즐기면서 / 道樂皇王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는 가운데 / 不倦于誨
그 서책들이 책상에 가득하였고 / 其書滿床
선생을 공경하며 먼 곳에서 찾아와서 / 摳衣自遠
묻는 일이 있으면 자세히 답해 주었다오 / 有問必詳
집안에서는 품행이 반듯하였고 / 行修於家
향리에서는 덕망이 드높았기 때문에 / 德尊於鄕
마을 사람들은 공경심을 일으켰고 / 鄕人起敬
자제들은 나아갈 방향을 알았어라 / 子弟知方
진량이 북쪽으로 와서 배우자 / 陳良北學
그보다 앞서는 학자가 없었나니 / 學者莫先
옛날에 호걸로 일컬어진 그 경우에 / 古稱豪傑
선생이 실로 해당된다고 하리로다 / 先生實然
생각하면 우리 선조와 / 惟我先祖
그리고 외조부께서 / 曁外王父
실로 선생과 함께 / 實與先生
벽수에 오르셨으니 / 同升璧水
정분이 두터운 것이 / 分契之厚
선대 때부터 비롯되었다오 / 爰自先世
그 뒤 선생이 이사를 하여 / 逮至徙居
거처가 아주 가깝게 되었나니 / 衡茅密邇
온양과 신창(新昌)은 맞닿은 곳으로 / 溫新接壤
동쪽과 서쪽으로 산 하나 사이일 뿐 / 一山西東
영광스럽게도 좋은 인연을 맞게 되어 / 因緣幸會
아랫자리에서 모실 수 있게 되었어라 / 得奉下風
예전에 절간에 머물면서 / 伊昔僧舍
며칠 동안 모시고 지낼 적에 / 從遊數日
학문과 덕업을 질의하면서 / 質疑問業
계발을 많이 받았었는데 / 多蒙啓發
세월이 어느새 훌쩍 흘러서 / 倏忽逮今
지금 어언 십칠 년이 지났어라 / 十年有七
그 뒤로는 쓸쓸히 고향을 떠나 / 其後離索
경사에 와서 벼슬을 하였고 / 來宦京師
지금 전원에 돌아오긴 했어도 / 及玆歸田
역시 경기 지역에 있게 되어서 / 亦在王畿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가운데 / 音塵莫接
무심하게 세월만 흘러갔어라 / 歷歲踰時
지난달 남쪽으로 돌아와서는 / 前月南歸
선생을 뵙고서 인사드리려 하였는데 / 擬拜函丈
안석과 지팡이를 쥐기도 전에 / 未操几杖
마침내 혜장에 곡하게 되었으니 / 遂哭蕙帳
다시 가르침을 받들지도 못하고서 / 更未承誨
이승과 저승으로 갈리고 말았어라 / 遽隔泉壤
나를 알아주신 분이 돌아가셨고 / 知己之亡
사도를 위해서도 슬퍼해야 할 일이니 / 斯道之喪
애통해하는 일을 누구에게 하겠는가 / 一慟誰爲
처창한 심정을 어찌 금할 수 있으리오 / 曷堪悼愴
그런데 개인 사정이 급박했던 탓으로 / 私事有迫
그만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 乃返窮廬
장례를 행할 때에도 전송하지 못했으니 / 葬又未送
한스러운 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하리오 / 此恨何如
글재주는 없어도 슬픈 마음을 담아 / 寓哀荒辭
눈물을 뿌리며 이렇게 글을 지어 / 拭涕而書
미천한 정성을 멀리 바쳐 올리오니 / 遠達鄙誠
혼령이시여 굽어살펴 주옵소서 / 魂其察諸
[주D-001]퇴도(退陶) : 이황(李滉)의 호이다.
[주D-002]염락(濂洛) : 송대(宋代)의 성리학을 말한다.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준말로, 즉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 · 정이(程頤) 형제,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 등 송대의 성리학자들을 가리킨다.
[주D-003]거주함에 …… 있으리오 : 공자가 구이(九夷) 지역에 가서 거하려고 하자, 어떤 이가 누추한 곳이라고 걱정을 하였는데, 이에 공자가 “군자가 거한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君子居之 何陋之有〕”라고 대답한 말이 《논어》 자한(子罕)에 나온다.
[주D-004]진량(陳良)이 …… 하리로다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진량은 초나라 출신으로서, 주공과 공자의 도를 좋아한 나머지 북쪽으로 중국에 와서 공부하였는데, 북방의 학자들 가운데 혹시라도 그보다 앞서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이른바 호걸지사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陳良 楚産也 悅周公仲尼之道 北學於中國 北方之學者 未能或之先也 彼所謂豪傑之士也〕”라는 말이 나오는데, 선 생원이 남쪽 지방 출신이기 때문에 이 말을 인용하여 기린 것이다.
[주D-005]선조와 …… 오르셨으니 : 벽수(璧水)는 주대(周代) 귀족 자제들을 가르치는 중국의 태학(太學)으로, 이들 세 사람이 동시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간 것을 말한다.
[주D-006]안석(案席)과 …… 전에 :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어른에게 어떤 일을 문의할 적에는 반드시 안석과 지팡이를 쥐고서 따라간다.〔謀於長者 必操几杖以從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혜장(蕙帳) : 향기로운 장막이라는 뜻으로, 은자(隱者)의 거처를 뜻한다. 남조(南朝) 제(齊)나라의 공치규(孔稚珪)가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에 은자가 떠나고 난 뒤의 정경을 묘사하면서 “향기로운 장막이 텅 비자 밤에 학이 원망하고, 산사람이 떠나가자 새벽에 원숭이가 놀라 우네.〔蕙帳空兮夜鶴怨 山人去兮曉猿驚〕”라는 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