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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


작성일 : 16-11-1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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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국문유서
연도 : 1593 관련되신 분 :
편저자(저자) : 소장처(관련) : 부산시립박물관
Cap 2016-11-17 10-10-54-531.jpg

 
1593년(선조 26) 9월 선조가 국민에게 내린 국문교서. 1점. 필사본. 보물 제951호. 75×48.8㎝. 당시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의주(義州)에 파천해 있었다. 그러나 의병의 봉기와 명군(明軍)의 지원으로 평양·경성 등의 실지를 회복했고 왜군은 남하해 부산·동래 등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이 포로가 되어 왜적에게 협조하면서 살아가는 자가 적지 않았다.
이에 선조는 일반 대중이 쉽게 알 수 있도록 국문으로 교서를 내려 왜군의 포로가 되어 있는 국민을 회유해 돌아오도록 한 것이다. 당시 김해수성장(金海守城將) 권탁(權卓)이 이를 가지고 적진에 잠입해 왜군 수십 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우리 동포 100여명을 구출해 나왔다.
 
이 문서는 권탁의 후손 집에 보관되어 오다가 1854년(철종 5) 김해시 흥동에 어서각(御書閣)이 건립되면서 줄곧 이곳에 보관되어 왔다. 이 교서는 양질 저지에 국문으로 총12항에 걸쳐 묵서(墨書)되었으며 ‘諭書之寶(유서지보)’란 어보가 세 곳에 찍혀 있다.
<셩의게 니글>이라는 제하에 10항에 걸쳐 교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부득이 왜인에게 잡혀간 백성들의 죄는 묻지 않음은 물론, 왜군을 잡아오거나 왜군의 동태를 자세히 알아 나오거나 포로된 우리 동포를 많이 데리고 나오면 양천(良賤)을 물론하고 벼슬을 시키겠다는 것이다.
 
이어 아군과 명군이 합세해 부산·동래 등지의 왜군을 소탕하고 그 여세를 몰아 왜국에 들어가 분탕하려는 계획도 알려주면서 그 전에 서로 알려 빨리 적진에서 나오라고 당부하고 있다.
이 문서는 임진왜란 당시 상황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공적 문서를 한문으로 기록하던 통례와는 달리 일반 대중, 특히 포로된 우리 백성에게 주지시키기 위해 국문으로 쓰여진 점에서 국문학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경상남도 김해시 흥동의 권성건(權聖乾)이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