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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


작성일 : 16-11-17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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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옹문집 과 선인적(宣仁迪) , 며느리이씨(李氏) 효행록
연도 : 1657 관련되신 분 : 선인적(宣仁迪)
편저자(저자) : 조구령1657~ 소장처(관련) : 한국학중앙연구원
◇ 정옹문집
저자 : 조구령 (1657 ~1719년)
4권 2책. 목판본. 1909년 8대손 창순(昌淳)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만도(李晩燾)의 서문, 권말에 이수악(李壽岳)의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연세대학교 도서관·동국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은 시 92수, 권2는 서(書) 15편, 제문 16편, 축문 7편, 비문 1편, 권3·4는 부록으로 세계도·연보·행장·행록·묘지명·묘갈명·만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자연과 풍물을 읊은 것이 대부분이며, 각체의 시가 고루 실려 있다. 「유서림(遊西林)」·「유금파정(遊錦波亭)」·「칠원도중(漆原道中)」 등은 명승고적을 관상하면서 산수의 아름다움과 영구함을 찬미한 것이고, 「우중우음(寓中偶吟)」·「야좌술회(夜坐述懷)」는 한가로이 지내는 생활의 감회를 읊은 시이다
서 가운데 「상갈암이선생(上葛庵李先生)」은 스승 이현일(李玄逸)에게 학문하는 방법을 질의한 내용이고, 「상부백(上府伯)」은 부사에게 그 지방에 사는 선인적(宣仁迪)이 100세에 가깝도록 장수하는 것은 며느리 이씨의 효성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이씨의 표창을 청한 글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옹문집 [酊翁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인적조 관련 내용
[원 문]
◯上柳府伯 德玉
九齡等 謹齊沐再拜上書于城主閤下 伏以達尊有三 齒居其一 天下之所貴者 莫過於德與
爵而齒與之竝者 何哉 誠以壽者 古今之所稀 而人世之罕有也 此邑有宣仁迪 卽淸白吏弘文校理 宣一德之六世孫也 宣武功臣宣克禮之子 年今九十有七歲 自少以誠孝友愛 播聞鄕里 至于老耋 實行若此 宜蒙爵褒而不圖 近年以來 誣上之輩 濫冒年歲 妄希加資 虛實相混 自此以後 老職之路一廢 以宣仁迪之遐齡耆老 竝坐冒年之科 終阻恩典之路 此豈非歎惜處乎 民等且觀人之得壽者 皆由於子孫 能順親志 而今宣仁迪 則有兩難 其子婦李氏 卽益齋先生之後裔 自入門之後 事舅之誠 歷數十年 終始如一日 可謂出天之孝也 略擧其一二 以備採聞焉 其舅年耄之後 兩目昏不能視 手足痿痺 不能運飮食 轉側皆須於人 李氏每食 必親持匙箸 以食之 每衣必親撫寒燠以衣之 滫瀡甘旨靡不竭力 或李氏少離之際 子女奉進飮食 則必曰 非子婦食不甘云 故李氏不得須臾離側 一日其舅 病痢泄累日 命幾絶 李氏嘗其痢以驗差劇 苟非性於孝者 其能如是乎 家甚貧窶而奉老 衣食之具 雖傭於他人 恢有其裕 使舅不知其艱苟之狀 其小姑出嫁者二人 貧不能自存 率眷來集于其家 五十餘眷 同鼎而爨 共機而織 一器之食 數尺之布 未嘗自私 而必與之分 一室之中 不使有翻唇反目之事 雖古之稱盛德 夫人何以加此 噫 壽者 五福之首 孝者百行之源也 以宣仁迪之壽 未蒙天爵 亦旣歎惜 況使李氏之孝 竝以沈泯 則將何以勸勉於當世哉 仄聞老職之路雖塞 而爲親叩閽之人 多得蒙允 是豈此路之永塞哉 惟在在位君子 採實轉聞之如何耳 況孝行一事 所以砥礪風節 扶植名敎 則民等此擧 非私於宣也 伏惟閤下 下車數朔 惠澤旁流 老老之仁 遍洽於一境 莫不歡欣 鼓舞於孝理之下 則民等安得不陳達於二天之下哉 伏惟閤下俯採公議 枚擧宣仁迪稀世之高年 且擧李氏出天之誠孝 轉報巡營 俾得上聞 得使壽而有所尊貴 孝而有所觀感 則豈但光耀於一時 抑亦有辭於後世矣
[번 역]
□유부백(柳府伯)께 올립니다. 덕옥(德玉) (上柳府伯 德玉)
구령(九齡) 등이 삼가 목욕재계하고 재배하고 성주합하께 글을 올립니다.
삼가 말한다면 달존(達尊)함이 셋이 있으니, 치(齒)가 그 첫째가 됩니다.
천하의 귀한 것은 덕(德)과 및 작(爵)이고 치(齒)는 그로 더불어 아우른 것에 불과하니 어쩝니까! 진실로 장수한다는 것은 고금에 드문 것이고 그리고 사람이 사는 세상에 드물게 있습니다.
이 읍에 선인적(宣仁迪)이 있으니, 곧 청백리이고 홍문관 교리인 선일덕(宣一德)의 6세손이고, 선무공신(宣武功臣)인 선극례(宣克禮)의 아들이니, 나이가 금년에 97세인데, 어려서부터 정성으로 효도하고 우애함으로 향리에 소문이 났고 늙음에 이르도록 이를 실천하였으니, 이와 같은 사람은 의당 벼슬과 포상의 은택을 입어야 하되,
근년 이래 무고로 상소하는 무리들이 나이를 부풀려서 망녕되게 가자(加資)함을 바라니, 허실(虛實)이 혼잡하여 이런 이후로는 늙은이에게 주는 수직(壽職)의 길이 한결같이 폐하였으므로, 선인적 같이 나이 많은 늙은이를, 나이를 속이는 죄인과 동일하게 보니, 그러므로 마침내 은전을 받는 길이 막히었으니, 이것이 어찌 탄석(歎惜)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희 백성들이 또 장수하는 사람을 보면 모두 자손에게 연유하니 능히 어버이의 뜻을 순하게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선인적은 두 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그 자부(子婦) 이씨(李氏)는 곧 익재선생(益齋先生)의 후손으로, 선문(宣門)에 들어온 이후로 시아버지 섬김을 정성으로 한 지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처음과 끝이 언제나 한 날 같으니 가위 하늘에서 낸 효도입니다.
간략히 그 한둘을 들어서 말하겠습니다. 그 시아버지가 나이가 늙은 이후에 두 눈이 어두워서 앞을 보지 못하고 수족이 마비되어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므로, 음식을 먹거나 옆으로 누울 때에는 모두 남의 손을 빌려야 합니다. 이씨(李氏)는 매양 식사에 반드시 친히 수저를 쥐고 먹이었으며, 매양 옷은 반드시 친히 춥고 따듯함을 보아서 입히고, 부드럽고 맛있는 음식은 힘을 다하여 만들지 않음이 없었고, 혹 이씨가 잠시 떠날 때에 자녀들이 음식을 올리면 반드시 말하기를,
“자부(子婦)가 만든 음식이 아니므로 맛이 없다.”고 하므로, 이씨는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그 시아버지께서 병으로 여러 날을 설사하니 목숨이 거의 끊어질 지경이었습니다. 이씨는 일찍이 그 이질로 차극(差劇 병세에 대한 차도)을 경험하여 고치었으니, 진실로 효도를 성품으로 하는 자가 아니면 능히 이와 같겠습니까!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으되, 그러나 노인을 받들면서 의식(衣食)을 갖추면서 타인을 고용하여 여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해서 시아바지로 하여금 어렵고 구차한 상황을 알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작은 시누이가 출가한 자가 두 사람이니, 가난하여 자존(自存)하지 못하므로 권솔을 인솔하고 그 집에 모이게 하였으니,
50여 명의 권솔이 한 솥에서 불을 때고 베틀을 함께 써서 베를 짰으며, 한 그릇의 음식과 몇 자의 마포도 일찍이 사사로움이 없고 반드시 그들과 함께 나누어서 한 집의 가운데서 반목하는 일이 있지 않게 하였으니, 비록 옛날에 성덕(盛德)이라 말하는 부인인들 어찌 이에서 더하겠습니까!
아! 장수함은 오복의 첫째이고 효도는 일백 행실의 근원이니, 선인적(宣仁迪)이 장수하였으나 임금이 주는 벼슬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이미 탄식할 일인데, 더구나 이씨의 효도를 나란히 잠겨서 없어지게 한다면 앞으로 어찌 당세에 효도하라 권면을 하겠습니까!
어렴풋이 들으니 수직(壽職)의 길은 비록 막히었으되, 그러나 어버이를 위해서 대궐에 호소하는 사람은 임금의 윤허를 입음이 많다고 하니, 이 어찌 이 길이 영원히 막히었다고 하겠습니까! 관직에 있는 군자가 있다면 실제 전하는 소문을 채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더구나 효행의 한 일이 풍절(風節)을 가다듬고 명교(名敎)를 붙들어 세우는 것이라면 곧 저희들의 이 일은 선인적의 사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합하께서 수레에서 내린 수개월에 혜택이 곁으로 흘러서 늙은이를 노인으로 여기는 인자함이 두루 한 지방에 젖어들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효도하는 이치를 아래에 고무하려고 한다면 저희들이 어찌 이천(二天)의 아래에 진달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생각하면 합하께서는 엎드려 공의(公議)를 채집하시고 선인적의 희세의 높은 나이를 낱낱이 들고 또한 이씨의 출천(出天)한 성효(誠孝)를 들어서 감영(監營)에 보고하여 상감께서 이 소문을 듣게 해서 장수한 자로 하여금 존귀함이 있게 하고 효도함을 보고 느끼게 한다면, 어찌 다만 한 때에 빛이 될 뿐이겠습니까! 또한 후세에 말함이 있을 것입니다.
원본출처:남명고문헌시스템에서 "宣仁迪" 으로 검색 http://nmh.g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