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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선씨를 빛낸분들


작성일 : 16-11-0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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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선거이(宣居怡)
연도 : 1588 관련되신 분 : 선거이(宣居怡)
편저자(저자) : 소장처(관련) : 서울시유형문화재304호
48.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선거이.jpg

 
이 그림은 1588년 정월에 있었던 여진족 시전부락 토벌에 대한 기록으로 당시의 토벌군을 이끌던 이일(李鎰)의 손자에 의해서 당시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현재 육군박물관에는 세월이 흘러 색이 바래지고 낡은 것을 다시 1849년에 그린 것이 전시되고 있다.
 
 
□ 원문
大將 嘉善大夫 咸鏡北道兵馬節度使 李公 諱鎰, 字重卿, 龍仁人(이일)
助戰將 折衝將軍 咸鏡北道兵馬虞侯 徐得運, 字德久, 利川人
從事官 彰信校尉 咸鏡北道兵馬評事 李用淳, 字士和, 全州人
從事官 承議郞 兼輸城道察訪 沈克明, 字伯晦, 靑松人
審藥 宣敎郞 李蕙汀, 字芳叔, 全州人
助戰將 及第 曺大坤
助戰將 及第 申恪, 字敬仲, 平山人
助戰將 及第 李瑛, 字公獻, 咸平人
助戰將 及第 元豪, 字仲英, 原州人
助戰將 前判官 韓仁濟, 字濟仲, 淸州人
助戰將 彰信校尉 撫夷堡兵馬萬戶 金億秋, 字邦老, 淸州人
助戰將 秉節校尉 訓鍊院參軍 朴弘長, 字士任, 務安人
左衛
先鋒將 折衝將軍 高嶺鎭兵馬僉節制使 劉克良, 字景善, 白川人
龍驤都將 及第 李[王+發], 字汝獻, 咸平人
虎賁都將 前縣監 李宗仁, 字伯春, 全州人
獅吼都將 及第 禹應台, 字三彦, 丹陽人
熊搏都將 權知訓鍊院奉事 黃大鵬, 字冲雲
豹攫都將 通德郞 通禮院引儀 金慶福, 字伯綏
左鶻擊將 及第 徐禮元, 字肅大
右鶻擊將 禦侮將軍 都摠府經歷 宋弘得, 字伯實
左火烈將 及第 李沃, 字子潤
右火烈將 及第 邊良俊, 字國萃
左部將 及第 姜仲龍, 字時用
前部將 及第 朴知進, 字退而
衛將 嘉善大夫 行會寧都護府使 邊彦琇, 字君獻
從事官 前判官 趙儆, 字士惕
中部將 彰信校尉 訓鍊院主簿 魯興文, 字斐然, 咸平人
遊軍將 彰信校尉 龍驤衛後部將 李琰, 字精叔, 全州人
右部將 及第 權洪, 字寬仲, 安東人
後部將 秉節校尉 副司果 宋悌, 字友叔, 南陽人
斬退將 及第 朴仁鳳, 字而瑞, 務安人
捍後將 顯信校尉 永建堡兵馬萬戶 朴潤, 字德用, 靈巖人
一繼援將 中直大夫 富寧都護府使 李時請, 字詠而, 丹山人
二繼援將 朝散大夫 慶興都護府使 鄭見龍, 字雲卿, 東萊人
右衛
先鋒將 折衝將軍 咸鏡北道 助防將 李薦
領將 權知訓鍊院奉事 姜萬男
龍驤都將 折衝將軍 行副護軍 宣居怡(선거이)
領將 保人 李用濟
虎賁都將 折衝將軍 前虞侯 金遇秋
獅吼都將 及第 吳彦良
熊搏都將 及第 李忠獻
豹攫都將 前察訪 黃進
左鶻擊將 宣略將軍 訓鍊院僉正 元熹
右鶻擊將 及第 李慶祿
左火烈將 及第 成天祉
右火烈將 及第 李舜臣(이순신)
左部將 顯信校尉 守門將 洪祐
前部將 權知訓鍊院奉事 辛礎
衛將 通政大夫 穩城都護府使 楊大樹
從事官 及第 金聲○
中部將 權知訓鍊院奉事 金夢虎
遊軍將 前判官 田鳳
右部將 訓鍊院習讀 元裕男
後部將 權知訓鍊院奉事
斬退將 前萬戶 金光睟, 字子潤, 義城人
捍後將 承義副尉 西水羅堡權官 林秀蘅, 字芳仲, 寶城人
一繼援將 通政大夫 鍾城都護府使 元均, 字平仲, 原州人 (원균)
二繼援將 奉訓郞 明川縣監
 
宣廟丙戌, 公陞移本道兵使, 仁威廣覃, 邊圍寧謐, 仍條陳軍務二十九事, 禁令二十七條, 竝錄制勝方略一件, 奏請取講諸將, 以行殿最, 上特令施之, 方略之詳備頒行, 自公始焉, 先是, 北邊野人, 款塞內附, 給其衣廩, 留居六鎭城底矣, 尼湯介潛誘越邊野人, 攻陷慶源, 搶奪高嶺, 公時莅慶源會寧, 皆建斬獲之功, 丁險, 公自本營巡到慶興, 密捕何吾郞等, 誅之, 令虞侯金遇秋, 襲破楸島部落, 蕩其巢穴, 是時, 慶興撫夷時錢等部强盛, 而夫汝只部落最强難制, 公遂將邊事馳啓, 上回諭因許討之, 公以戊子正月, 簽發本道兵, 副以赴戍兵, 使會寧府使邊彦琇, 穩城府使楊大樹爲左右衛將, 高嶺僉使劉克良, 助防將李薦爲左右衛先鋒, 習陣于行營, 蓐食于德明驛, 左軍, 由阿吾郞地白顔烟臺, 循山而北, 右軍, 自撫夷城東, 越江而西, 合圍時錢之面四部落, 焚燒穹廬三百餘所, 斬首幾五百級, 上命遣宣諭官兵曹正郞李大海, 犒勞將士, 命官公之一子, 是役也, 盖公勦胡屢功之最著者, 赫赫若前日事也, 後世, 雲仍之追慕壽傳, 無如繪事之七分典型, 故公之孫水使公, 命工圖寫綃障, 幾本珍奉于宗支諸孫矣, 年久渝泐, 旦經回祿, 餘存者只一本, 恐或仍又泯磨, 先蹟, 無瞻依之地, 迺鳩禊財, 描畵新本三件, 依舊家藏, 以寓紹先紀蹟之萬一云爾, 崇禎紀元後四己酉閨夏, 八世孫在寬謹書。
 
□ 번역문
  선조 병술년(丙戌年, 1586)에 공(公)이 본도(本道, 함경북도)의 병사로 승진하여 옮기니 인위(仁威)가 널리 퍼져 변방이 편안하고 조용하였다. 이에 군무 29사(事)와 금령 27조(條)를 조목조목 진달(陳達)해서 함께 수록하여 『제승방략(制勝方略)』 1건을 만들어 여러 장수들을 모아 강론하여 전최(殿最)에 반영할 것을 시행하기를 주청(奏請)하니 상께서 특명으로 시행하라 하셨다. 방략(方略)이 상세하게 갖춰지고 반포되어 시행된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보다 앞서 북변(北邊)의 야인들이 변방에 이르러 내부(內附)하니 옷가지와 곡식을 지급하여 육진(六鎭)의 성저(城底, 성벽으로부터 10리 이내)에 머물도록 하였는데, 니탕개(尼湯介)가 변방 너머의 야인들을 몰래 유혹하여 경원(慶源)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고령진(高嶺鎭)을 약탈하였다. 공은 그때에 경원(慶源)·회령(會寧)을 다스렸는데 모두 참획(斬獲)의 공을 세운바 있었다.
정해년(丁亥年, 1587) 겨울에 공이 본영(本營, 북병영)으로부터 순시하여 경흥(慶興)에 도착하여 하오랑(何吾郞) 등을 몰래 붙잡아 죽였다. 그리고 우후(虞侯) 김우추(金遇秋)에게 명령하여 추도(楸島) 부락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그들의 소혈(巢穴)을 없애버렸다. 이 때에 경흥 지방의 무이(撫夷), 시전(時錢) 등의 부락이 강성하였고, 부여지(夫汝只) 부락이 가장 강성하여 제압하기 어려웠다. 드디어 공이 장차 변방을 도모할 일로써 치계(馳啓)하니 상께서 이로 인하여 토벌하는 것을 허락한다고 회유(回諭)하셨다.
공이 무자년(戊子年, 1588) 정월에 본도의 병사를 징발(徵發)하고 부방(赴防)하는 수병(戍兵)을 더하여 회령부사 변언수(邊彦琇)와 온성부사 양대수(楊大樹)로 하여금 좌·우위장(左右衛將)으로 삼고, 고령진첨사 유극량(劉克良)과 조방장 이천(李薦)을 좌·우위의 선봉장으로 삼아 행영(行營)에서 습진(習陣)을 하고, 덕명역(德明驛)에서 아침 일찍 그 자리에서 식사를 마치고[蓐食],
좌군(左軍)은 아오랑(阿吾郞) 땅의 백안연대(白顔烟臺)를 거쳐 산을 돌아 북쪽으로 나아가고, 우군은 무이보(撫夷堡)의 성벽 동쪽으로부터 강을 건너 서쪽으로 나와 합세하여 시전의 네 방면 부락들을 포위하여 궁려(穹廬, 유목민족의 장막으로 된 막사) 3백여 곳을 태워버리고 거의 500급을 참수하였다. 상께서 선유관(宣諭官)으로 병조정랑(兵曹正郞) 이대해(李大海)를 파견하여 장사(將士)들에게 음식을 먹여 수고를 위로하고[犒勞] 공의 아들 한 명에게 관직을 주도록 명하였다.
이 전투는 대개 공이 오랑캐를 무찔러 쌓은 공훈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으로 그 혁혁함이 마치 어제의 일과 같다. 후세에 먼 후손들이 추모하고 영원히 전할 수 있는 것으로 바람직한 것은 그림을 그려놓는 것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공의 손자인 수사공(水使公, 이견(李汧))이 화공에게 명하여 비단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써서 몇 건을 종손(宗孫)과 여러 지손(支孫)으로 하여금 보배로 받들게 하였다.
세월이 지날수록 색이 바래지고 갈라졌거나 하루아침에 불타서 없어지기도 하여 남아있는 것이 다만 한 건 뿐이라 혹여 남은 것도 민멸(泯滅)되고 닳아서 선조의 사적(事蹟)을 바라보며 의거할 곳이 없어질까 염려되어 이에 재물을 모아 그림 3건을 새로 그려 예전 집안에 간직하던 법대로 소장하여 선조를 계승하고 자취를 기록하는 일의 만 분의 일이나마 다하고자 할 따름이다.
숭정(崇禎) 기원 후 4번째 기유년(己酉年, 1849) 윤달(4월) 여름에 팔세손 재관(在寬)이 삼가 쓴다.
대장 가선대부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이공 휘일, 자중경, 용인인
[중략]
용양도장 절충장군 행부호군 선거이
[중략]
우화열장 급제 이순신
[중략]
일계원장 통정대부 종성도호부사 원균 자 평중, 원주인
[중략]

□ 聞巖先生忠義錄 ( 문암선생충의록 )
임란시 의병장이며 토벌전에 참여 했던 신초(辛礎  :   생몰년 : 1549 - 1618) 문암선생의 문집에도 명단이 자세하게 나오는데 문암성생충의록의 간행년도가 미상이라 문암선생인지 아니면 후손들이 기록한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Cap 2016-11-03 14-54-22-524.jpg
(聞巖先生忠義錄 卷一 169面, 165面 )

 
聞巖先生忠義錄 卷一 169面  내용
宣廟己丑特賜諸戰將畵像列錄 ( 선묘기축특사제전장화상렬록)
捍後將顯信校尉永建堡兵馬萬戶朴潤 字德用靈巖人
一繼援將中直大夫富寧都護府使李時請 字時倩丹山人
二繼援將朝散大夫慶興都護府使鄭見龍 字雲卿東萊人
右衛
先鋒大將折衝將軍咸鏡北道助防將李公薦 字時馨
領將權知訓鍊院奉事姜萬男 晉陽人
龍驤都將拆衝將軍行副護軍宣居怡 寶城人 (용양도장 탁(절)충장군 행부호군 선거이 보성인)
右火烈將及第李公舜臣 字德水人 (우화열장 급제 이공 순신 자덕수인)
前部將權知訓鍊院奉事辛公礎 字支叟靈山人
虎賁都將拆衝將軍前虞侯金遇秋 淸州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