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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선씨를 빛낸분들


작성일 : 16-11-0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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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丙子胡亂)과 쌍령전투(雙嶺戰鬪)
연도 : 1636 관련되신 분 : 선세강(宣世綱)
편저자(저자) : 소장처(관련) : 경기광주시문화원
병자호란은 1636년 음력12월에 발발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40년이 채 안된 때였다.
조선(朝鮮)의 조정은 끔직한 왜란(倭亂)을 당한 후에도 국토방위에 힘을 쓰기는커녕, 정변(政變)이 거듭되어 선조(宣祖)가 죽자 광해군(光海君)이 왕위에 올라, 갖은 폭정(暴政)으로 얼룩지고, 조정(朝廷)의 신하들은 당파 싸움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무능한 능양군 인조(仁祖)를 왕위에 앉히고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이 정권(政權)을 쥐고 있으면서, 명(明)나라만을 추종하면서 정치를 하다가, 청나라를 배척하게 되니, 신흥국(新興國)인 청나라의 막강한 군사 120,000이 습격해 들어오니 졸지에 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조정(朝廷)에서는 각도에 긴급 명령을 내려 왕을 구할 것을 지시했으나, 군대라고는 아주 미미하여, 경상도에서 병사(兵使)들이 오합지졸의 군사를 40,000명이나 거느리고 이곳 쌍령에 도착하여 진을 쳤으나, 화력(火力)도 시원치 않고, 훈련도 제대로 안된 군사들이 먹지도 못하고, 추위에 지칠 대로 지쳤고, 날씨는 엄동설한에 싸울 힘도 없었으나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청나라 군사들은 잘 훈련된 기마병(騎馬兵)을 선두로 우리군의 진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청군(淸軍)의 막강한 화력과 기마부대는 우리군의 진지를 종횡무진 유린하게 되어, 급기야 우리 군사는 거의 전멸(全滅)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총지휘관인 허완장군, 민영장군, 선세강 장군도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죽주산성(안성 일죽면)에서 이 보고를 받은 이의배장군이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쌍령리로 오다가, 매복해 있던 청군의 습격을 받아 거의 전멸하고, 이의배장군도 장렬히 전사하고 만 것이다.

◇ 정충묘 제례

병자호란이 끝난 후, 나라에서는 이곳에 모신 네 분 장군들의 영령(英靈)을 위로하고, 전사(戰死)한 군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제사(祭祀)를 올리도록 하게 되었다. 인조왕 이후 계속해서 나라에서 치제(致祭)를 하였으니, 그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숙종대(肅宗代)에는 남한산성 행궁(行宮)에서 몇 일을 묵고, 여주의 영릉(英陵)을 가다가 쌍령리에 다다르자, 왕이 말에서 내려 병자호란때에 전사한 장군들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간소한 제물(祭物)을 준비하게 하여 제(祭)를 올리고 간 일이 있었다.
 
이와 같이 정충묘의 제례는 국가차원에서 치제하였는데, 조선조(朝鮮朝) 말 고종(高宗)이 등극하고 흥선대원군이 집정(執政)하게 되면서, 전국의 서원(書院)을 철폐하고, 국제(國祭)를 폐지함으로서 나라에서 관장(管掌)하던 정충묘의 제사도 없어지게 되었다.
그 후 쌍령리의 동민들이 뜻을 모아 동리에서 주민들이 정성을 드려 매년 동리제사로 모셔왔던 것이다. 그러나 몇 년전부터 광주시에서 예산을 배정하여 지방정부 차원에서 제례를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2013년 부터는광주문화원에서 제례절차를 주관하고, 제수준비와 모든 절차, 제후 음복, 접대는 쌍령리에서 담당 하도록 하였다.
 
◇ 정충묘에 모셔진 4위의 행장

1. 허완(許完) 장군 -경상좌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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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양천(陽川), 字는 子固, 시호(諡號)는 충장(忠莊)이다. 25세 때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수군통제사 이순신장군 휘하에 들어가 충무공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선전관 을 거쳐 유성룡의 천거로 남평현감이 되고,
선조37년에는 단천군수(端川郡守), 후에 훈련원 중군(中軍)이 되었다. 1604년(선조5) 경상우도병마절도사, 1629년 회령부사가 되어 국경수비를 담당, 그 뒤 전라도병마절도사, 충청도수군절도사, 1635(인조13년)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어, 1636(인조14)년 병자호란때, 이곳 쌍령전투에서 적과 대전하다가 패하여 많은 군사가 죽자 자결하였다. 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2. 민영장군 - 경상 우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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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여흥(驪興). 조선중기(朝鮮中期)의 무신(武臣)으로 의주부윤을 지내고, 1635년(인조13)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승진하였다. 병자호란때 과감히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였고, 군사를 이끌고 인조(仁祖)를 구하기 위하여 남한산성으로 가다가 이곳 쌍령전투에서 청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전쟁 후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되었다.조선 영조때에 척화절인(斥和節人) 26인의 치제(致祭)를 건의 할 때 이에 뽑혔으며, 시호(諡號)를 충장(忠壯)이라고 내렸다. 

3. 이의배(李義培) 장군 - 충청도 병마 절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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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의백(宜伯), 시호(諡號)는 충장(忠壯)이다. 1599년(선조32)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선전관, 감찰을 역임한 후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한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록(冊錄)되었고,
한천군(韓川君)에 봉해 졌다. 그는 인조4년 남한산성을 축조한 총융사 이서(李曙)의 매부이기도 하다. 그 후 충청. 전라. 황해. 함경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1636년 병자호란때, 죽주산성에서 남한산성의 인조(仁祖)를 구하려 직접 가려고 하였으나,
광주의 쌍령에서 우리군사가 청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쌍령으로 군사를 이끌고 달려 오다가 적군과 마주쳐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 하였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그의 아들 이목(李穆)은 이괄(李适)의 난 때 순국 하였다. 그의 고향에는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4, 선세강(宣世綱)장군 - 안동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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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사거(士擧), 호는 매곡(梅곡)이며, 참의(參議) 봉장(鳳章)의 아들이다. 1603년(선조36) 무과(武科)에 급제, 평안도 벽단진첨사(碧團鎭僉事)를 제수 받고, 그 뒤 경기중군(京畿中軍)이 되어 영평산성(永平山城)의 축조를 감독하였다.
 
당상관(堂上官)이 된 뒤 홍주영장(洪州營將), 안동영장(安東營將)을 역임하고, 병자호란때 허완장군과 함께 경기도 쌍령에서 우세한 적과 접전하여 많은 적을 죽였으나, 끝내 패전, 장렬히 전사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그의 선조와 함께 전남 장흥의 포충사(褒忠祠)와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배향 되었다.◇ 경상도 감사 심연(沈演)의 위패를 철거한 사유심연(沈演)은 병자호란 당시 경상도 감사로 있으면서, 인조(仁祖)의 명을 받고도 속히 출정(出征)치 않아 전란(戰亂)중에 잡아다가 국문(鞠問)하라는 상소가 많았고, 나중에 여주에 이르렀다가 쌍령에서 우리 군사가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군병(軍兵)을 조발한다는 핑계로, 되돌아 조령(鳥嶺)-문경새재 을 넘어갔다고 하여,
전쟁이 끝난 후 유배(流配)된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명백하며, 다른 곳으로 이배(移配)된 사실도 기록이 있다.그러므로 당시 쌍령전투에는 한푼의 공적도 없음이 밝혀져서 위패(位牌)를 철거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병자록(丙子錄),남한지(南漢志),남한일기(南漢日記)등
 http://www.gjcc.or.kr/subpage/sub02_02.html?boardMode=view&idx=14&bcode=12&page=2&category=&sopt=&sval= 광주문화원 싸이트에서
 
◇한민족 치욕 쌍령전투

 쌍령이라는 말은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에 위치한 고개로 고개 두개가 연속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큰 고개는 대쌍령, 작은고개는 소쌍령으로 명명되고 있으며 이들 고개를 합해 쌍령리고갯길로 불리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쌍령(大雙嶺)은 주 동쪽 40리, 소쌍령(小雙嶺)은 주 동쪽 45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어 과거부터 쌍령이라는 이름이 사용돼 오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쌍령리 고갯길은 인근 쌍령리 마을을 가로질러 곤지암천과 백마산 줄기가 뻗어있어 배산임수형태의 마을에 진입할 수 있는 곳으로 지리적으로 수려함을 자랑한다.
 
 병자호란 와중인 1637년 1월, 현재의 경기도 광주 동쪽 약 16km 지점에 있는 쌍령에서 조선군과 청군 간 전투가 벌어졌다. 바로 한민족 역사상 최악의 졸전(拙戰)으로 꼽히는 쌍령전투다. 조선군 4만 명이 청군 300여 명에게 전멸했다는 기록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일 리가 없다. 쌍령 지역은 절대 4만 명의 병력이 주둔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청군의 수도 전체 병력이라기보다는 돌격전을 펼친 기병 수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전체 병력 면에선 오히려 조선군이 청군보다 적었을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수적 열세가 쌍령전투 패전의 이유일까. 아니다. 진짜 이유는 조선군의 실전훈련 부족, 이로 인한 기초적 전술 매뉴얼의 부재다. 화약이 비싸다 보니 당시 조선군 병사 한 명에게 지급된 화약은 고작 2냥이었다. 이는 겨우 10발 정도를 발사할 수 있는 양이었다. 비싼 화약을 아껴야 하니 훈련이 제대로 됐을 리 없다.
 
쌍령전투 당시 조선군이 전장에서 화약이 떨어졌다고 적에게 들리도록 소리를 지르고, 화약을 분배하다가 불을 내고, 모든 화약을 한 군데에 모아 놓은 건 실전 훈련의 부재를 증명한다.
 
조총은 사격 속도가 느려서 기병이 저지선을 돌파하면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서 청군의 기병 돌격을 저지하려면 창검병을 외곽에 배치해 저지하고 고지에서 사격하는 게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조선군은 목책을 바리케이드 삼아 사격전을 폈고 청국 기병이 목책을 돌파하자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실전훈련과 경험을 통해 효과적 전술을 찾고 최소한의 실전 매뉴얼을 갖춰야만 올바른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 매뉴얼을 맹종하는 건 문제지만 실전에서 검증된 지침과 새로운 전술 창안의 기반이 될 객관적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는 매뉴얼의 가치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실용적인 지침이 없다면 작전 논의는 추상적인 관념론으로 흐를 뿐이다.http://news.donga.com/3/all/20131010/58134205/1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동아일보에서
 
◇ 또 하나의 이유는 제대로 된 리더가 없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리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에 사무치게 보여주는 전례가 있다. 바로 쌍령(雙嶺)전투다. 병자호란 때 일어난 쌍령전투는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 민족사에서 어쩌면 가장 치욕스러운 전투라 하겠다. 인조 14년(1636년) 12월 청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2차로 조선을 침공했다. 기병을 보유한 적의 빠른 진격 속도에 미처 달아나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혀 구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4만 명에 달하는 조선군이 북상했다. 지휘관은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6810>)이었다. 조선군은 임진왜란 당시보다 훨씬 개량된 조총 1정씩을 보유하고 있었다. 1637년 1월 3일, 오늘날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 일대에서 이들은 청나라군과 마주쳤다.그런데 청나라군은 불과 기병 300여 기였다. 4만 명의 조총수와 300여 기의 기병. 언뜻 보기에 승패는 뻔한 듯했다.

◇“허완, 늙고 겁에 질려 눈물 흘리는 장수”조선군은 2만씩 나누어 민영은 오른편 산등성이에, 허완은 왼편 낮은 곳에 진을 치고 목책으로 둘렀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조선 후기의 역사서 <ec2e>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ec2f>에 따르면 이때 조선군에 지급된 화약은 2냥이라고 되어 있다. 2냥이면 대략 10발의 탄환을 발사할 수 있다. 아직 조총에 대한 훈련이 제대로 되지 못한 군사들에게 많은 양의 화약을 지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군이 진을 친 뒤엔 오히려 청군이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가진 조선군에 먼저 공격을 가했다. <ec2e>연려실기술<ec2f>에선 “청군 선봉 33명이 목 방패를 들고 남산 상봉에서부터 물고기를 꿴 것처럼 줄줄이 공격해 왔다”고 묘사했다.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있었던 청군이 낮은 곳에 있던 조선군을 내리 덮쳤던 것이다.

조선군은 몹시 당황하고 놀랐다. 조총을 제대로 쏘기 위해서는 사거리를 감안해 적들을 충분히 근접시킨 뒤에 사격을 해야 했다. 하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적을 보자마자 마구 쏘아댔다. 설상가상으로 장수들 역시 경험이 없어 화약 배분을 잘하지 못해 금방 화약이 동이 나고 말았다.
 
선봉 33명에 의해 조선군의 화약이 모두 떨어진 것이다. 화약이 떨어져 막대기 같은 조총을 들고 우왕좌왕하는 조선 병사들 머리 위로 나머지 청나라 기병들이 뛰어올랐다. 대혼란에 빠진 조선군들은 서로 도망치기 바빴다.
 
이 와중에 4만 병사 중 절반이 넘는 병사가 청나라 기병들의 칼에 맞아 죽은 게 아니라 먼저 도망치려는 아군에 깔리고 밟혀 죽었다. <ec2e>병자남한일기(丙子南漢日記)<ec2f>에 보면 “도망가다 계곡에 사람이 쓰러져서 쌓이면서 깔려 죽었는데 시체가 구릉처럼 쌓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사상 초유의 압사사건(壓死事件)이다. 이 과정에서 경상좌병사 허완도 깔려 죽었다.

남급이 쓴 <ec2e>병자일기(丙子日記)<ec2f>에선 더 나아가서 “흩어진 병사들이 목책에 도달했으나 목책을 넘지 못하고 넘어지면 그 뒤로 계속 시체가 쌓였고, 목책을 넘은 병사는 목책 밖이 험준해 추락해서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오른편 산등성이에 있던 경상우병군은 화약을 나눠주는 과정에서 불똥이 떨어져 대폭발이 일어났는데 장수 2명이 죽고 진영이 크게 동요되었다. 호기를 만난 청나라 기병들이 덮쳤고 이 과정에서 경상우병사 민영이 전사했다.

결과적으로 청나라 기병 300 대 조선군 4만, 즉 청나라 기병 한 명이 133명의 조선군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조선군의 패인은 단지 화약이 떨어졌다는 것만이 아니다. 쌍령의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지 못하고 밀접 대형으로 배치하는 등 전략적 안목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패닉(panic), 즉 공황(恐惶)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큰 그림을 보지 못한 총체적 리더십 부재의 결과다. 허완이나 민영은 그동안 특별한 능력이 없어 변방을 돌다가 인조반정에 편승해 이른바 낙하산으로 진급한 사람들이었다.
 
연려실기술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허완은 나이가 많고 겁에 질려서 사람을 대하면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무능한 인물이 중책에 임명되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쌍령전투다.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4683 중앙선데이 노병천 한국전략리더십연구원장  쌍령전투 관련하여 기사와 자료를 읽다보니 한숨이 나오네요. 4만명의 군사가 3백명의 기병에 농락당한 최악의 전투이네요. 그런 전투를 이끈 장군들을 위해 제례를 올리다니 아쉬움이 남습니다. 또한 이 때 숨진 4만명의 장졸들은 한 어머니의 아들이며, 한 아낙의 남편이었으며,
한 아이의 어버이었을 텐데, 이들을 위한 위폐하나 없다는 게 참 쓸쓸합니다.  경상감사 심연의 위폐를 철거하면서 그 곳에 이름모를 구국의 영웅들을 위한 위폐가 모셔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렇게 최악의 전투와 함께 여러가지 구전설화가 전해지고 있어 소개해 드립니다.
 
낙화암  병자호란때 경상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와서 남한산성밖에 진을 치고 있었다. 산성밖에 있는 언덕에 진을 치고 있자, 그 근처 많은 백성들이 몰려와서 보호를 요청하므로 부녀자들만을 군사들이 호위하게 되었다. 노도처럼 밀려온 오랑캐들은 가는 곳마다 살육과 노략질과 부녀자들에 대한 겁탈에 혈안이 되고 있던 때라 부녀자들만을 한 곳에 모아 보호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적군은 대병력을 몰아 쳐들어왔다. 좌우병사는 전군에 명을 내려 양군은 서로 어울려서 한참 격전을 벌였다. 우병사 부하들에게 소리를 쳤다.

「아녀자들은 산성안으로 피신시켜라」「안됩니다. 산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막혀서 뚫지를 못합니다.」「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뒷산 제일 높은 곳으로 대피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얼마후에 보니 처음에는 어느쪽이 우세한지 분간을 할 수 없었는데, 차츰 아군들이 밀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승전의 기색을 알게 된 적군은 더욱 사나워졌다. 미쳐서 날뛰는 맹수들처럼 우리편 군사들은 전멸시키려고 대들었다. 그러자 경상우병사가 부하군졸들에게 소리소리 호통을 쳤다.

「사직의 존망이 걸려있는 싸움이다! 물러가는 자는 한 칼에 벨 것이니,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라!」
그러나 일단 전의를 상실한 군사들은 자꾸 밀리기만 했다. 이때 좌병사 허완은 단신으로 말을 몰아 성난 사자처럼 장창을 휘두르며 적진을 누비면서 순식간에 적병을 수없이 찔러 쓰러뜨렸다. 쫓겨가던 군사들도 주춤 돌아서서 다시 힘을 얻어 싸우기 시작했다.
무수한 화살이 날으로 장검이 번득이는 속을 종횡무진으로 달리며 싸우던 허완장군은 마침내 집중하는 화살을 온몸에 받고 말 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대세는 또 다시 바뀌어 전세는 걷잡을 수 없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허완 장군은 명장답게 장렬한 전사를 하고 말았으나 수하에 있는 수천 군사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서 우왕좌왕 뒷걸음을 치며 밀려오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던 여인들은 절망과 비탄에 빠져 간간이 비명만을 지르고 있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 지자, 산 아래까지 도달한 적병들은 산 위에 있는 여자들을 보고 제각기 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한 여자가 나서서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싸움은 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녀자들은 이대로 오랑케 놈들에게 붙잡혀서 더러운 굴욕을 당하느니 보다는 스스로 생명을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일 것입니다. 온몸이 오랑캐놈들의 손과 발에 더렵혀지다가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백제시대의 삼천궁녀들처럼 깨끗하게 죽음을 택합시다.
 
말을 마치고는 산 뒤쪽에 있는 벼랑으로 가서 몸을 던져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다른 여자들은 잠시 멍하고 있엇으나 곧 이어서 모두 뛰어가 몸을 던졌으니 천추의 원한을 품은 채 장렬한 죽음을 택한 것이다.

수백 명의 꽃같은 여자들이 절개를 지키어 이 민족의 고결한 정신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한 광격을 바라본 우병사 민영 이하 전 장병들은 이를 갈며 다시 적병들과 용감하게 싸웠으나 워낙 중과부적이라 얼마후 모두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廣州郡草月面)에 가면 쌍령이라는 곳에 부녀자들이 몸을 던진 바위가 있는대 그곳엔 이러한 내력이 서려 있는 것이다. 후에 나라에서 사당(祠堂)을 짓고 원혼을 제사지냈다고 한다.
 
광주문화원 싸이트에서 병자호란때 숨진 진(陳)노평

 진노평은 속칭「진터벌」이니 남한산성에서 내려다보이는 광나루쪽 평야를 말하는데 이곳에는 병자호란 때 정절을 지키다가 참혹한 죽음을 당한 한 부인의 다음과 같은 슬프고도 갸륵한 일화가 서려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인조14년 봄이었다. 영의정 김유의 집에서는 그 부인의 생일잔치가 벌어져서 많은 조신(朝臣)의 부인들이 모였다. 이때부터 벌써 미구에 전란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한 소문이 돌고 있어서 좌중의 화제는 자연 여기에 미쳤다.
「실제로 오랑캐들이 쳐들어온다면 그 일을 어찌하겠습니까. 그 짐승들에게 만약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한 부인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좌중의 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모두다 치마끈으로 목을 매어 죽든지 물에 빠져 죽든지 물에 빠져 죽든지 해야지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 힐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서 조용히 고개를 젓는 부인이 있었으니 평소에 별반 말이 없는 김승지 부인이었다.
「일이란 당해 보아야 알지 어찌 장담부터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럼 김승지 부인은 오랑캐에게 몸을 허락할 수도 있단 말이오?」
 
좌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치욕보다는 죽음을 택한다고 장담한 이참판 부인이 김승지 부인의 말을 탓하고 나섰다. 「짐승에게 몸을 허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벌써 짐승이나 다름없어요!」
 
결국 김승지 부인은 이 자리에서 이참판 부인에게 큰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해 겨울에 기어이 호란은 일어나고,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자 조정 백관들의 권속들도 우왕좌왕 남한산성을 향해 피난길을 재촉 하였다. 대부분이 부녀자들과 노약자들로 이루어진 행렬이었는데 그 속에는 김승지 부인과 이참판 부인도 끼여 있었다.
 
그러나 일행은 광나루로 건너자마자 용골대가 거느린 청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젊은 부인들만 다시 가려져서 호진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날 밤, 「일이란 당해보아야 안다.」고 말한 김승지 부인은 야욕을 채우려고 덤벼드는 적장을 차고 있던 은장도로 찔러 죽이고 자기도 죽음을 당했다.

이와는 반대로 그토록 호언장담하며 김승지 부인을 모욕했던 이참판 부인은 용골대에게 끌려가자 자진하여 온갖 아양을 부렸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용골대의 첩이 되어 청나라로 가버렸다. 정절을 지킨 김승지 부인의 시체는 다음날 대노한 용골대에 의해 토막이 나서 호진 밖의 벌판에 버려졌다.
 
이곳이 바로 진벌터이니 김승지 부인의 갸륵한 죽음을 전하는 이 이야긴 오늘날까지도 듣는 이의 가슴에 감동과 함께 숙연한 교훈을 주고 있다.  광주시청 싸이트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처참히 죽임을 당한 남자들과 달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처연히 목숨을 버린 아녀자들의 정절이 더 존경스럽네요. 이 역사의 치욕을 거울 삼아 더욱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국력을 강화해야겠네요.

[출처] 구국의 넋을 위로하는 정충묘 - 2013년 11월 10일|작성자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