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기는 중국 요녕성(遼寧城) 출신 김육불(金毓黻, 1887~1962)이 만주와 관련된 고문서를 집대성한 자료집에 편입되었다. 그 자료집은 요해서사(遼海書社)가 1933년 10월에서 1936년 4월 사이에 신식 연인본(鉛印本)으로 인행한 ≪요해총서(遼海叢書)≫이다.
그리고 1989년 신문풍공사(新文豊公司)가 인행한 “총서집성(叢書集成)” 속집(續集)의 제280집 속에도 수록되었다. 이 속집에 수록된 자료는 북경대학교도서관에 소장되었고, 그 자료를 본 고려사이버대학교 남은경 교수가 2009년 학계에 논문으로 소개하였다.
아직까지는 그에 합당한 호응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후금의 제1차 대규모 하북 공략에 관하여 제3자로서의 외국인 기록물이라는 점에서도, 병자호란을 겪기 전에 만주와 하북의 구체적 동향을 전해주는 기록물이라는 점에서도 ≪심양사행일기≫는 주목될 필요가 있다.
이 값진 역사적 기록물이 오늘날까지 남게 된 데는 선종한(宣宗漢, 1762 ~1843)을 비롯한 보성선씨(寶城宣氏) 후손들이 100여 년 동안 보여준 숭조(崇祖)정신에 기인한다.
정조(正祖) 23년(1799)에 오충사 전신인 옥산사(玉山祠)를 세워 1802년 제향(祭享)하기에 이르러 ≪보성선씨 오현 행적(寶城宣氏五賢行蹟)≫을 간행하였고, 옥산사가 다시 순조(純祖) 31년(1831) 조정의 사액을 받아 오충사(五忠祠)로 되자 ≪보성선씨 오세 충의록(寶城宣氏五世忠義錄)≫을 1844년 간행하였으며,
철종(哲宗) 13년(1862) 오충사의 보성선씨 5위에 대한 증직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자 ≪보성선씨 사액 오충신록(寶城宣氏賜額五忠臣錄)≫을 1900년 간행하였는데, 그 속에 선약해의 ≪심양일기≫가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심양사행일기≫를 주석하고 번역하였으며, 새로운 자료 포함한 이본들의 현황을 정리하고 대교(對校)도 하였다. 또 선약해의 <행장>을 주석하고 번역하였으며, 행장에 나타난 오류를 바로잡는 글까지 썼다. 그리고 이 자료를 처음으로 학계에 소개해준 고려사이버대학교 남은경 교수의 논문 1편도 실려있다.
❚차례
머리말
일러두기
심양사행일기 入使瀋陽日記
이본의 현황과 대교선약해의 ≪심양일기≫ / 남은경(고려사이버대학교 교수)
부록
수사공 행장水使公行狀
선약해 <행장>의 관력(官歷)에 대한 교정(矯正)
≪심양사행일기≫影印
수사공행장(水使公行狀) 金墰,
≪보성선씨 오현 행적(寶城宣氏五賢行蹟)≫
심양일기(瀋陽日記)
≪보성선씨 사액 오충신록(寶城宣氏賜額五忠臣錄)≫, 1900년
심양일기(瀋陽日記)
≪요해총서(遼海叢書)≫ 권52
수사공심양일기(水使公瀋陽日記)
≪보성선씨 오세 충의록(寶城宣氏五世忠義錄)≫, 1844년
수사공심양사행일기(水使公入使瀋陽日記)
≪보성선씨 오현 행적(寶城宣氏五賢行蹟)≫, 1802년경
❚저자 소개
선약해(宣若海)
본관 보성(寶城). 자 백종(伯宗). 1605년(선조 38)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631년(인조 9)에 비변사(備邊司)로서 국서(國書)를 가지고 선양[瀋陽]에 사행(使行)했다. 이때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정신으로 일을 처리하고 돌아와서 품계(品階)가 승진되었다. 후에 평산부사(平山府使)가 되고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이르렀다. 임지에서 죽었으며,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배향되었다.
❚편역자 소개
신해진(申海鎭)
경북 의성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석․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현재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역서 17세기 호란과 강화도(역락, 2012)
남한일기(보고사, 2012)
광산거의록(경인문화사, 2012)
강도일기(역락, 2012)
병자봉사(역락, 2012)
남한기략(박이정, 2012)
대학한문(공편, 전남대학교출판부,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