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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선씨를 빛낸분들


작성일 : 16-11-03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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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선극례
연도 : 1592 관련되신 분 : 선극례(宣克禮)
편저자(저자) : 소장처(관련) : 경상대학교 도서관
가, 여말선초 왜구의 노략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섬나라 일본의 해상(海上) 왜구(倭寇)들은 수시로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며 강제로 남의 나라 재물을 노략(擄掠)질하고 무고한 양민들을 해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왜구란 역사적으로 13~16세기에 걸쳐 중국과 우리 나라 근해(近海)를 설치고 다니며 갖은 노략질을 자행하던 일본의 해적(海賊)들이다.고려 중기 권신(權臣) 최충헌(崔忠憲)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무신정권기) 몽고가 금(金)나라와 남송(南宋)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한 후 고려 정복의 야욕을 뻗쳐 수차에 걸쳐 몽고에 시달리고 있을 무렵 남으로는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우왕 2년(1376) 11월 1일 왜구들이 양주(梁州 : 양산)언양기장고성 등지에 쳐들어 와 닥치는대로 약탈하여 달아났다(「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 이해 11월 5일 그들은 울주(蔚州)회원(會原 : 마산)의창(義昌 : 창원) 등지에 쳐들어와 민가를 불사르고 노략질하여 거의 남은 것이 없었다. 또 12월에는 다시 양주와 울주의 2주(州)에 왜구들이 쳐들어와 주민을 도륙(屠戮)하고 달아났다.이듬해 4월 왜구가 황산강(黃山江 : 낙동강)으로 침입하여 왔으므로 울주양주밀성(密城 : 밀양)계림(鷄林 : 경주) 등지의 민가에 불을 지르고 노략질하여 거의 남은 것이 없었다. 또「고려사」에 의하면 “이 해 또 왜구들이 언양현에 쳐들어 왔고, 계림부윤 윤승순(尹承順)이 달려나와 이들을 깨뜨리고, 4급(級 : 베어죽인 적의 목)을 베었다”고 하였다.
우왕 5년(1379) 윤 5월 울주에 왜구들이 쳐들어왔다. 6월 그들은 또 울주청도밀성자인(慈仁 : 현 경북 경산시의 일부지역)언양 등지에 쳐들어왔다. 이때 우인열(禹仁烈)배극렴(裵克廉)하을지(河乙沚)오언(吳彦) 등이 맞싸워 깨뜨리고, 울주싸움에서 병선 7척을 노획하고 적 10급(級)을 베었다(「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 이해 7월에 왜구들이 울주에 쳐들어 왔는데, 이들은 벼와 기장을 마구 거두어 저들의 군량으로 삼았고 다시 기장(機張)으로 쳐들어 갔다.
이 때 경상도상원수 우인열(禹仁烈)이 군사를 모집하여 동래현(東萊縣)에서 이들과 맞싸워 7급을 베었다.우왕 7년(1381) 6월에 왜구들이 50척의 선단(船團)으로 김해부(金海府)를 쳐들어와 산성(山城)을 포위하니 경상도원수 남질(南秩)이 이를 깨뜨렸다. 남질은 더 나아가 울주양주언양영해(寧海) 등지에서 싸워 무릇 5번의 싸움에 8급을 베었다(「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
 
나,임진왜란의 발발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왜장 고니시(小西行長)가또오(加藤淸正) 등이 거느린 25만의 대군이 부산에 상륙한 후 3로(路)로 나누어 북상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신입(申砬)을 시켜 이를 막게 하였으나 충주에서 대패하고 5월 2일 서울이 함락되고 왕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 6월 13일 평양이 함락되고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는 함경도에서 포로가 되었다.

관군이 패전을 거듭하는 동안 해상에서 이순신이 홀로 제해권(制海權)을 쥐어 일본군을 쳐부수고 조헌(趙憲)곽재우(郭再祐)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정문부(鄭文孚)휴정(休靜)유정(惟政) 등 의병장이 나와 크게 활약했다.

한편 조선의 요청으로 명나라의 원군(援軍)이 참전, 이듬해 서울을 수복하고 화의를 추진시켜 일본은 남해안에 철수, 잠시 전투가 중지되었으나 화의의 결렬로 1597년(선조 30) 다시 대대적인 침입(정유재란)이 감행되었다. 이때 조선과 명나라의 전력 증강으로 일본은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더 나오지 못하고 해상에서는 여전히 이순신의 용전에 의해 많은 타격을 받아오다가 1598년 도요또미(豊臣秀吉)의 죽음으로 철수,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다.
 
다,물막고개(勿幕峴)

가지산과임진왜란 때 언양의병들이 최초로 집결했던 물막고개(구수리 대암마을)고헌산에서 발원한 언양 남천과 간월산에서 발원한 중남천이 쌍수도호에서 합수되는 곳에 삼각주(三角洲)가 생겼는데 이 삼각주의 수세(水勢)가 약해진 곳이 늪(구늪)이 되었고, 두 물이 다시 세력을 얻어 동으로 내 달리다가 구늪들이 끝나는 지점에서 산모롱이에 부딪쳐 소(淵)가 되었는데 이 소가 곧 구수연(九藪淵)이다. 그리고 이 구수연 입구에서 동쪽으로 들어가는 골짜기가 물막골(물막고개)이다.

언양은 지리적 여건으로 예로부터 교통과 군사적 요충지였다. 언양에서 울산 방향(국도 제24호)으로 내려오면 장촌마을(반송상리)이 나오는데 장촌에서 구늪다리(구수교)를 건너 구늪숲에서 직강공사를 한 뚝길을 따라 내려가면 구늪들이 끝나는 산 모퉁이에 반송보(盤松洑)가 있다. 지금은 구수연(九藪淵)이 직강공사로 유로(流路 : 물길)가 달라져 없어졌으나 이 소가 유명한 구수연(九藪淵)이 있었던 곳이고 물막현(勿幕峴)이 시작하는 서쪽 끝이다.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길이 나 있었는데 지금은 대암댐으로 인하여 길이 막혔다. 이 지점이 동쪽 끝 부분이다.

또 언양과 장촌, 공촌(반송중리)사람들이 문수산으로 나무를 하고 풀을 베러 다니던 삶의 길이였을 뿐 아니라 웅촌면 대양, 삼동면 둔기, 작동 사람들이 언양장을 보러 다니던 장길이기도 하였다. 대암댐을 막기 전에는 삼남면 구수리였는데 댐이 완성된 뒤에(1973. 7) 언양면으로 편입되었다.

구수리 대동에서 삼동면 둔기로 가는 사이 물막골(勿幕谷)로 가는 고개가 곧 물막고개(물막현)이다. 이 지역은 절벽이 둘러 선 천혜의 험요지(險要地)로 군사상의 요충지(要衝地)였다. 당시의 호병터로 지금은 부근에 육군 제7765부대 1대대(울주군향토예비군교육대)가 있다. 임진왜란 때 언양현의 여러 의병(義兵)들이 여기에 집결(集結)하여 결진(結陣)하려고 하자 갑자기 공중에서 “물막(勿幕 : 진지에 막을 치지 말라), 물막”하는 소리가 나서 물막고개란 이름이 생겼다고 하며, 막을 치지 못하고 서쪽으로 병력을 이동했다고 하니 곧 신불산의 사자평(獅子坪)과 단조성(丹鳥城)이 아니었나 싶다.

이 물막고개는 언양 의병들의 최초의 집결지로 알려지고 있다.「울산읍지」(1934) 고적조(古蹟條)에 “물막현은 삼남면 구수리에 있는데, 임진왜란 때 언양고을의 여러 의사들이 여기에서 설진(設陣)하려 하자 공중으로부터 진막(陣幕)을 치지말라는 소리가 났다(勿幕峴在三南九秀里 壬辰諸義士慾結陣于此自空中有聲勿幕云)”고 하였다.

선조 25년(1592 : 임진) 4월 13일 왜군들이 부산포에 상륙,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튿날 경상좌도 병사(兵使) 이각(李珏)이 소식을 듣고 울산군 하상면(下廂面)의 병영(兵營)에서 동래성(東萊城)으로 달려갔다. 15일 울주군수 이언함(李彦) 등이 포로가 되었다. 17일 좌수영(울산) 등이 잇달아 함락되고 19일 가등청정(加藤淸正)과 과도직무(鍋島直茂) 등이 양산(梁山)에 이어 언양(성)을 점령하였다.

언양현감 위덕화(魏德和)의 상부 보고에 “선조 27년 4월 을사일(乙巳日)에 기장(機張) 두모포(豆毛浦)에 주둔한 적병(敵兵) 500여 명이 언양현 석남촌(石南村 : 현 상북면 덕현리 일대)을 포위하여 분탕(焚蕩)질하고 남녀 5명을 포로로 잡아갔다(「선조실록」권 56)”고 하였다.

선조 30년(1597 : 정유재란) 11월 28일 왜장 가등청정은 울산에 성(도산성 : 학성)을 쌓고 웅거(雄據)하는데 경상좌병사 성윤문(成允文), 훈련원판관 이경연(李景淵), 경주부윤 박의장(朴毅長), 울산군수 김태허(金太虛), 언양현감 김흔(金昕) 등은 각 요로(要路)에 매복하였다가 이들을 협격(挾擊 : 협공)하였다.선조 31년(1598 : 무술) 8월 20일 경상좌병사 성윤문(成允文)이 왜장 모리수원(毛利秀元)의 군사가 언양으로 쳐들어 왔으므로 군관(軍官) 고충경(高忠卿) 등과 합세(合勢)하여 이들을 추격(追擊)하였다.
 
라, 사자평(獅子坪)싸움

「학성금신록(鶴城衿紳錄)」충의편 유광서조(兪光瑞條)에 향인 신광윤(辛光胤)과 더불어 45인이 창의(倡義)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신광윤(辛光胤)은 아들 신전(신)을 데리고 고을사람 유광서와 같이 향인들과 창의를 하고 향리의 가정(家丁 : 하인)을 모우고 언양현에 소속한 유방군(留防軍) 및 잡색군(雜色軍) 수백명을 규합하는 한편 덕천역(德川驛)에 배속한 복마(卜馬)를 찾아 의병을 일으켜 하늘에 맹세하였다. <의용장 신광윤(義勇將 辛光胤)>이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니 나부끼는 깃발은 산야를 덮고 그 기세가 대단했다.

부로산 기슭의 운제사(雲際寺), 덕천역의 수석사(水石寺 : 지금의 작천정 입구 주차장 일대), 단조성 아래 간월사(澗月寺)가 있었으므로 스님들도 참가하였다.그리하여 신불산(神佛山) 단조봉(丹鳥峰 : 성을 일명 단지같다 하여 ‘단지성’이라고도 함)의 험요지를 의지하고 삼남면 방기리 뒷산인 사자평(獅子坪)에 진을 쳤다. 이 때 의병들은 담을 쌓고 구덩이를 파며 복병을 매복하고, 또 무리들로 하여금 수십 군데에 돌무더기를 쌓아 올리고 무더기마다 큰 깃발을 세우고 풀을 묶어서 의병(疑兵 : 적을 속이는 허수아비 병정)을 만들어 세워 크게 성세(盛勢)를 떨치니 의병(義兵)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이러한 작전으로 적을 맞아 싸우며 적을 목베임과 무기 등을 노획함이 많았다 한다(「울산울주지」 충의편).

또한 밤이면 의병(疑兵)에 담뱃불을 붙여 험요한 곳으로 적병을 유인하기도 하였으며, 단지로 총통을 위장한 계략을 썼다고 하는 구전(口傳)도 있다. 이렇게 적을 유인하니 마침내 왜적의 무리들이 떼를 지어 다가왔다. 이 때 의병들은 서로 다투어 싸워 적을 목베임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또 적의 무기를 노획함도 적지 않았다.

단조성의 동편 금강골(지금의 포사격장 일대)은 지세가 험악하여 난공불락(難攻不落) 일당 만(一當萬)의 천연의 요새로 알려져 왔다. 그러므로 왜적들이 수차례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많은 희생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신광윤의 실기(實記)「義勇軒遺事」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아니한다.
 
마,운문산(雲門山) 둔진

「언양읍지」산천조(山川條)에 가사현(加士峴)은 현의 서쪽으로 31리에 있으며 일명 가슬현(嘉瑟峴), 즉 석남산(石南山) 동록(東麓)에 있다 했으며, 또 관방조(關防條)에는 고을 서쪽 석남산 동쪽 기슭에 있는데 깊은 골이 이어져 있다. 임진왜란 때 양읍(兩邑 : 청도. 언양)의 의병들이 각각 향병(鄕兵)을 이끌고 왜적을 막으니 감히 넘보지 못하였다. 청도 의장(義將) 박경윤(朴慶胤)이 병사를 이끌고 설복(說伏)한 곳이 언양과의 경계인 이곳이라 하였다(언양읍지).

한편 울산의병 박진남(朴震男)은 기박산성(旗朴山城)에 진을 치고 병영을 기습하였다가 운문산으로 진을 옮겼다. 여기에서 사모(私募)하였던 전사(戰士) 이창우(李昌佑), 박대신(朴大臣) 등 20여 인이 소모구호(召募口號)를 방곡(坊曲)에 붙이고 의군기(義兵旗)를 높이 세웠다. 그리하여 백성들에게 알려 주물(鑄物)을 내게하고 진중의 기술자로 하여금 창검과 활촉 등을 만들며 각궁(角弓) 수천 장도 만들었다.

또 언양 의사 신전(辛)의 군도 이 때 군량을 싣고 진중에 합세하여 같이 조련을 하였다. 동산의사(東山義士) 이경연(李景淵)의 군도 합군하여 적을 섬멸할 뜻을 전해오자 운문 진중이 용기백배하며 대오(隊伍)와 군용(軍容)이 더욱 엄숙하였다. 5월 22일에는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초유문을 본 경주 의사 최진립(崔震立)이 격문초(檄文草)를 잡아 소모(召募)하니 연소역강(年少力强)한 지원자가 수백명에 달했다.

이에 수일이 지난 뒤 의장기를 높이 걸고 운문산신에 기도하고 제사하였다. 이 때 김진(金軫), 이철(李澈), 박경전(朴慶傳), 박형(朴炯), 이경연(李景淵), 이한남(李翰南), 최진립(崔震立), 이의잠(李宜潛), 고처겸(高處謙), 류백춘(柳伯春), 손기양(孫起陽), 이몽란(李夢鸞), 안근(安瑾), 정호인(鄭好仁), 최대기(崔大期), 신전(辛) 등의 의사들이 모여 단상에 올라 사졸(士卒)들을 격려하고 해가 져서야 돌아가 막을 방책을 강구하였다
 
(五月二十二日 見招諭使金誠一招諭文 慶州義士崔震立 草檄文又意招募之意…其中年少力强之願從者 數百人後數日 高揭義將旗 禱享雲門山神淸彦 各殺木牢而供之緇徒數十 羞豊備饌羞享士卒 來會義士金軫 李澈…崔大期 辛等 杖劒登壇激勵士卒 暮歸各陣 以備禦敵督戰之策). 이상은「회암실기(悔巖實記)」용사록(龍蛇錄)의 기록이다.
 
이렇게 하여 험요한 운문령에 설진한 의병들은 수시로 출격하여 적을 치니 그 성세가 크게 떨침을 보고 경상좌병사 박진(朴晋)이 6월 2일에 소을 잡아 보내며 위로함에 사졸들의 용기가 백배하였다. 의사 최준립(崔峻立)과 윤대붕(尹大鵬)도 창의하여 마을 장정들을 이끌고 가슬령을 지켰는데 가슬령(嘉瑟嶺) 역시 지금의 운문산(雲門山)을 말하는 것이다(「蔚山壬亂史」. 李有壽).
 
바,선무원종공신 마애석각과 추모비

 언양지방의 임진왜란에 관한 문헌은 매우 빈약하여 그 전모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삼남면 작괘천변에 있는,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워 난후에 훈호(선무원종공신)를 받은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선무원종공신마애석각>은 민족정기의 말살정책이 우심하던 일제식민치하에서 새겨지고 향사(享祀)되었다는 점과 또한 조상의 호국충절을 이어 받은 민정정기의 계승과 애국 위선보본(爲先報本)정신의 유로(流露)라고 할 수 있으며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어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선무원종공신마애석각은 공신 10인의 이름과 관직 및 본관을 새겨놓고 있는데, 1936년 10월 18일에 이룩된 것이다. 이는 1926년(병인) 7월 16일 그 후손들이 원모계(遠慕契)를 성계(成契)하여 그 해에 20원(圓)의 자금이 조성되고 제사를 모시면서 10년 후인 1936년(병자)까지 36원의 자금이 모금되고 이 해 다시 20원을 갹출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 원모계 계원들은 당시 언양에 살고 있던 공신의 후손들이다. 그러므로 임란 후 언양으로 전입해온 공신들의 후손도 포함되어 있다. 그들이 처음(1936년) 이 석각을 조성하고 해마다 한번씩 제사를 모시다가 일제의 탄압과 광복 후의 혼란 및 한국전쟁 등으로 오랫동안 궐향(闕享)되다가 1984년(갑자) 12월에 다시 그 후손 및 향림(鄕林)들이 추모사업추진회(회장 계림 金知煥)를 구성하고 모금하여 1986년(병인) 5월 9일(음력 4월 13일)에 다시 마애석각 옆에 <선무원종공신추모비>를 세우면서 다시 속향(續享)하게 되었다.

당초(1936)의 석각에는 김정서(金廷瑞), 선극례(宣克禮), 이언량(李彦良), 최환(崔環) 등 10인 공신들을 새겼으나 이때 정부의 도움으로 추모비를 세울 때는 종래 누락되었던 이섬(李暹)과 신광윤(辛光胤), 신전의 부자를 추록하였다. 당초(1936년)에 이름이 새겨져 향사(享祀)를 드리던 공신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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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삼동면은 당시 삼남면에 속해 있었다.

또 1986년 5월에 건립한 추모비에 추가된 분(3인)들의 조서(調書)는 다음과 같다.

Cap 2016-11-03 15-24-25-017.png
 
위의 1등공신 이언량과 이섬, 3등공신 신광윤과 신전은 각각 부자지간이다. 또 여기에는 새겨지지 않았지만 최환의 아버지 최정(崔汀 : 部將, 전라좌도병마절도사)은 2등공신이고 아들 최억명(崔億命 : 司僕寺正)은 3등공신으로 일문(一門) 직계삼충(直系三忠)이다.

그 후 언양고을이 난으로 초토화되어 능히 자립할 수 없었으므로 울산에 합속되어 (선조 때 13년간 울산에 속해 있었으므로) 그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 추모비는 원래 물가인 마애석각 옆(아래)에 있었으나 1995년 조금 윗쪽(앞산 기슭)으로 옮기면서 현재의 비각을 세웠다.

그러나 확정적인 자료는 아닐지라도 숙종 37년(1711)의 언양현신묘식호적대장(彦陽縣辛卯式戶籍大帳)을 살펴보면 공신의 직계, 외족, 처족의 증조 범위에 거명(擧名)되는 공신이 71명이나 되고 그 중에 직계후손을 둔 공신이 33명이나 되는 점으로 보아 이 지방의 임진왜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위에서 김정서(金廷瑞), 선극례(宣克禮), 최환(崔環) 등은 외지에서 공을 세우고 임란 이후에 그 후손들이 언양으로 전입해 온 공신들이고, 이언량(李彦良), 이섬(李暹) 등은 언양출신으로 타지역에서 공을 세웠고, 그 외 백근손(白斤孫), 김반수(金磻守), 김언원(金彦元), 류문수(柳文守), 박연경(朴延慶), 김응룡(金應龍) 등 6인과 1986년 5월에 건립한 <추모비>에 추록된 신광윤(辛光胤), 신전(辛) 등 8인이 언양출신으로 언양에서 공을 세운 공신들이다.

그리고「울산울주지(蔚山蔚州誌)」,「언양읍지」등 기타 문헌에 의하면 정소질산(鄭小叱山 : 3등), 최준립(崔峻立 : 3등), 김여경(金麗慶 : 3등), 김흥립(金興立 : 3등), 위덕화(魏德和 : 3등) 및 공신으로 서훈(敍勳)되지 않은 유광서(兪光瑞), 윤대붕(尹大鵬), 김인원(金仁元), 김응량(金應亮) 등 의사가 언양출신이거나, 언양회맹(彦陽會盟)에 참가하였거나, 언양지방에서 활약한 의사라고 여겨진다.그리고「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1605)에는 신분이 천한 관노(官奴), 사노(寺奴 또는 私奴), 면천(免賤)을 비롯하여 승려로서 공신에 훈록된 의병도 있었으나 언양지역의 것은 전하는 바가 없어 아쉽다. 한편 울산지방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순국한 박언복(朴彦福 : 3등), 박인립(朴仁立 : 1등)부자의 충효(忠孝)를 기린 반곡사(盤谷祠)가 언양읍 반곡리에 있었으나 폐허가 되고, 후손들의 성금으로 후일 상북면 길천리 뒷마을(後里)로 옮겨 세운 것이 지금의 충효사(忠孝祠)이다.
 
사,의사들의 활약상과 공신록권

 위에서 언급한 선무원종1등공신 김정서(金廷瑞), 선극례(宣克禮), 이언량(李彦良), 최환(崔環), 이섬(李暹), 2등공신 백근손(白斤孫), 김응룡(金應龍), 3등공신 김반수(金磻守), 김언원(金彦元), 류문수(柳文守), 박연경(朴延慶), 신광윤(辛光胤), 신전(辛) 등 13공신은 모두 2000년 10월에 건립된 울산 충의사(忠義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또 최준립(崔峻立), 위덕화(魏德和), 김흥립(金興立), 김여경(金麗慶), 정소질산(鄭小叱山)(이상 모두 3등공신)과 공신으로 서훈되지 아니한 유광서(兪光瑞), 윤대붕(尹大鵬), 김인원(金仁元), 김응량(金應亮) 등의 사적은 인물조(人物條)에서 별도로 다룬다.

이외에도 공신 김석부(金石夫), 한귀만(韓貴萬), 김춘억(金春億) 등은「蔚山府戶籍大帳」(광해군 1년 ; 1609)에 언양현 사람으로 조사되어 있다. 「언양현호적대장」은 1983년 12월 20일 지방(경남)지정유형문화재 제239호(후일 울산광역시 지정 제9호 : 1997. 10. 9)로 지정되었다. 숙종 37년(1711)의 것으로 여기에는 직계 증조, 외증조, 처증조까지의 선무원종공신의 직함과 성명이 기재되어 있어 언양지방의 임란사를 살펴보는데 직접적인 자료는 아닐지라도 왜란이 끝난 113년 후의 자료이고 보면 언양지방의 훈록된 선무원종공신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기록된 공신 71인 중 혼인으로 인한 처족, 외족(승려 포함)의 후손을 둔 공신이 38인이고 직계후손을 둔 공신이 33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종래 파악되었던 작천정 선무원종공신마애석각 및 추모비의 13인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이 33인의 공신에 대하여 선무원종공신록권과 비교해보면 녹권 55쪽과 56쪽에 일부나마 집중적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 훈공을 상신할 때 명단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짐작이 된다.
 
宣武原從功臣追慕碑(文)
 
天然勝地酌川亭 맑은 물가 이땅 千古의 歡戚을 같이한 큰 바위에 宣武原從一等功臣護軍江陵金公廷瑞와 一等功臣大護軍寶城宣公克禮 一等功臣正慶州李公彦良 一等功臣副正慶州崔公環 二等功臣守門將水原白公斤孫 三等功臣守門將鷄林金公磻守 三等功臣出身金寧金公彦元 三等功臣守門將文化柳公文守 三等功臣僉正密陽朴公延慶 二等功臣司僕金寧金公應龍을 往昔에 敍書鐫刻하였고 今者 本鄕出身 同功一體의 一等功臣折衝慶州李公暹 三等功臣部將靈山辛公光胤 三等功臣僉正靈山辛公을 이 貞石에 함께 登崇함은 그 功戰丹忠을 追仰하고 煌顯後世함이다. 噫라. 우리 民族史에 지울 수 없는 壬辰倭亂 祖國江山을 蹂한 倭敵의 醜惡한 핏자국 가셔진지 四百年 오래인데 그 侵略의 所爲는 새삼 責치 않을지나 爲國忠節을 다하신 내 나라 先烈偉勳을 追仰敬慕함이 끝이 있으리요. 壯哉라. 公들은 筆耕硯田하고 平和을 愛護한 儒生이었으나 國難을 當함에 筆管을 던지고 救國의 붉은 忠精으로 舍生取義 慨然倡義하여 民兵을 일으키고 劍鋒干戈가 닳고 휘어지도록 擊殺斬獲 敵를 무찔러 戰勝攻取한 功勳이 功臣에 올랐으니 높은 忠節 그 누가 敬崇하지 않으리요. 大蓋 父母에게 孝道하고 나라에 忠誠함이 人性의 本然이라 하나 公들과 같이 本性을 다함이 어찌 쉬우리오. 公들의 忠義는 우리 民族의 精神的核이요 脈搏이며 本體인데 一
 
時인들 잊으리까. 公들의 後裔가 世居同鄕함에 以爲尙虔所하야 將欲合享이었으나 미치지 못하여 이에 刻珉하고 精誠모아 歲一享을 하였는데 어찌타 時流에 묻혀가고 雨露에 젖어 蒼苔 덮이고 여기 義士岩 있음과 이 고을에도 많은 功臣 났음을 잊혀져가니 거룩한 救國의 忠恩을 잊어가는 듯 부끄럽다 아니하리요. 公들 忠裔와 鄕人이 뜻을모아 追慕하는 貞珉을 세우는데 顯刻文을 나에게 맡기나 그 높은 忠節과 功勳이 國朝實錄과 功臣錄에 실려있고 일찍 큰 선비들의 붓끝으로 顯楊하였음이 여러곳에 있는데 何敢贅言하리요.
다만 各其懿績을 收載하지 못하고 考證文憑이 湮沒하여 彦陽縣內에 있었던 戰跡을 나타내지못함이 可惜하도다. 想하건대 公들의 體魄은 復土이나 芳名은 不沫하고 義氣는 在山在河 빛나며 不滅의 忠魂은 在天하여 나라와 겨레의 無窮한 榮光을 蔭佑하시리라. 後學들이여 爲國하는 마음이 缺如하면 國力이 貧弱하고 弱한者에게 强한者의 侵辱이 있음은 古今 人類의 歷史가 말해주나니 銘戒하여 公들의 忠義를 之하고 이 遺迹이 邦土을 守護하는 人紀를 바르게하는데 보탬이 되도록 永保以傳하기 바라며 精華事業에 感懷있으나 무딘 붓 拙文을 부끄러워할 뿐이다.

檀紀四千三百十九年「西紀一九八六年」丙寅元宵節
鷄林 金知煥 謹撰
慶州 李鍾千 謹書
追慕事業追進會 謹竪
役事所要物力義士諸公後裔各門專擔表誠世降俗末嘉尙之事矣

선무원종공신추모가(宣武原從功臣追慕歌)
최이락(崔二洛) 작사. 정익화(鄭益和) 작곡.
선무원종공신추모비 제막일(1986년 5월 9일) 시창(始唱)

(1) 고헌산 精氣받은 유서깊은 옛터
 
魚龍도 감동하던 壬亂七年에
軟弱한 붓끝이 槍劍으로 바꼈으니
毅然한 그 氣像 뉘라서 당하랴.
나라 위해 목숨 바친 님의 넋이여
장하다 그대 이름 길이 빛나리.
 
(2) 社稷의 기운 기둥 버티어온 옛터.
 
草木도 느껴 아는 壬亂七年에
꽃다운 그대 이름 功臣錄에 올랐으니
지나는 길손마다 옷깃 여미네.
뜻있는 鄕人들이 돌을 새기니
장하다 님의 忠節 길이 빛나리.
 
아.克禮祖 문헌 자료
 
자료 출처 : 남명고문헌 시스템 (경상대학교 도서관 문천각)
http://nmh.gsnu.ac.kr/  검색 : 선극례(宣克禮)
 
○ 영지요선(嶺誌要選) 1892年 경상도대구부 嶺誌要選卷之四十七 81面 무과      宣克禮 水使

○ 오한선생문집 聱漢先生文集卷之四 公山誌 10面 使新寧縣監及刖將 宣克禮     오한선생 손기양(1559年 ~ 1617年)

○ 양산군지(梁山郡誌) 梁山郡誌卷之二 (新補)忠義 46面   宣克禮 字禮中官大     護軍萬曆壬辰行慶尙左水使戊戍殉節宣祖朝錄原從一等功臣恩賜玉杯錄券

○ 김해읍지(金海邑誌) 武科  110面  宣克禮 壬辰亂宣武原從一等功臣行大護     軍慶尙道左水使兼釜山僉使

○ 교남지(嶠南誌) 1940年   嶠南誌卷之五十一  金海郡 人物   84面 (武科)     宣克禮 寶城人武虞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