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경화(宣景化)
생존기간 1910;22세 ~ 미상
출생지 경기 장단
운동계열 의병
훈격(연도) 애국장 (95)
공적내용 경기도 장단(長湍) 사람이다. 홍원유(洪元有)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7월 일제는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등 식민지화를 향한 발걸음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분격하여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거나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주구배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통하여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선경화는 이같은 시기에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1908년 12월 홍원유 의진에 들어가 경기도 삭령(朔寧)·마전(麻田)·양주(楊州) 등 각 군을 돌아다니며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마전군 하신면(河新面)의 친일 면장 윤중구(尹重九)가 과거 의병들의 군자금 요구에 불응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행동을 일본군 수비대에 밀고한 원한을 갚기 위해 그를 죽이자는 홍원유 의병장의 발의에 찬동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9월 9일 홍원유 이하 일행 7명이 같은 면 향길리(香吉里) 장현(長峴)에서 윤중구를 처단할 때 우윤구(禹潤九)와 함께 이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는 1910년 의병활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비상 수단으로 음력 3월 3일 밤 동지 허길보(許吉甫)와 공모하여 마전군 장신면(長新面)에서 군자금 4백 냥을 거두는 등 친일파 처단과 의병자금 징수에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10년 6월 24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았으나, 공소하여 9월 17일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5년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140·141면
□ 선도명(宣道明)
생존기간 1854. ~ 1909.10. 8
출생지 미상
운동계열 의병
훈격(연도) 애국장 (91)
공적내용 1908년 음력 2월 심남일(沈南一) 의진에서 장경선(張京先)·김판옥(金判玉)과 함께 도포장(都砲將)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그후 1909년 음력 7월 21일 심남일 의진이 광무황제(光武皇帝)의 해산조칙(解散詔勅)에 따라 해산되자 1909년 10월 8일 3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전남지역에서 항일활동을 계속하던 중 성자동(成子洞) 전투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3卷 207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603·651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2輯 573面
□ 선규명(宣圭明)
생존기간 1869. 3. 24 ~ 1909. 5. 21
출생지 전남 보성
운동계열 의병
훈격(연도) 건국포장 (2006)
공적내용 전남 보성(寶城) 출신으로 안규홍의진(安圭洪義陣)의 선후군장(先後軍將)이 되어 보성·순천(順天)·고흥(高興)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전남 보성 출신의 안규홍은 1907년 군대해산 후 거의를 목적으로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고 주인에게 군량과 자금을 받아내는 한편, 참봉 안극(安極)에게서도 무기와 자금을 제공받았다.
1908년 2월 관북 출신의 강성인(姜性仁)과 합세하여 병력 70여 명으로 대오를 정비한 후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안규홍의진은 1908년 2월부터 1909년 9월 25일 체포될 때까지 보성·진산·순천·고흥·장흥·광양·함평 등지에서 대일 항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08년 2월 보성으로 들어오는 일본군에 대한 기습작전을 전개하여 전군을 궤멸시킨 파청대첩(巴靑大捷)과 1908년 8월 24일 진산(眞山)에서 일군 수비대 및 기병과 격전을 벌여 일본군 5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크게 이긴 진산대첩(眞山大捷), 그리고 1909년 5월 이후 함평의 심남일(沈南一)과 연합전선을 꾀하여 각처에서 유격전을 감행한 것이었다.
안규홍은 1909년 9월 25일 보성에서 광주경찰서 토벌대에게 체포되어 1911년 5월 5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하였다. 선규명은 1908년 봄 안규홍의진에 참가하여 선후군장(先後軍將)이 되었다. 선규명은 보성 파청대첩(巴靑大捷), 동복 운월치전투(雲月峙戰鬪), 진산대첩(眞山大捷) 등에 참전하여 크게 이겼고, 그 외 고흥·순천·대원사 등지에서도 승전을 거두었다.
1909년 9월 25일 안규홍이 체포된 뒤 의병진을 해산하고 귀향, 1939년 10월 12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註 ·寶城宣氏族譜(1955) 권3 ·澹山實記(1983. 2. 20) 追錄 102·103·107면 ·敬通(1985. 5) ·山陽三綱傳績修誌(寶城鄕校, 1992) 上 47면
□ 선화인(宣化仁)
생존기간 1883. 1. 7 ~ 1943. 1.15
출생지 전남 해남
운동계열 독립만세운동
훈격(연도) 대통령표창 (2002)
공적내용 전남 해남(海南) 사람이다. 1919년 4월 11일 해남읍(海南邑)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일제의 침략정책에 반대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희망하던 청년 김동훈(金東勳)에 의해 계획되었다.
김동훈은 4월 1일 같은 마을의 청년 안정석(安正錫)·안유석(安儒錫)과 만세운동을 의논하는 한편, 자신의 집에서 김경두(金璟斗) 등과 함께 소형 태극기 8백여 장과 대형 태극기 6개를 제작하였다. 4월 11일 정오 경 김동훈이 동료들과 해남로(海南路) 큰 길거리에서 대형 태극기를 높이 들어 신호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군중들이 모두 독립만세를 부르며 모여들었다. 이때 선화인도 해남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여기에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해남읍 홍교(虹橋) 부근에서 김성철(金相喆)과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군중을 이끌었다.
선화인은 이 일로 피체되어 1919년 4월 17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判決文(光州地方法院 長興支廳, 1919. 4. 17)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619面